4월, 2025의 게시물 표시

경계에서만 보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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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스템사고 팟캐스트] 음성으로 요약본을 들어 보세요. (5분 48초) 클릭 카페에 있는 책 중에 하나 골라서 읽어봤습니다. 이야기 꾼 성석제를 좋아하기 때문에 고른 책입니다. 본인의 여러 단편 소설을 묶은 책인데 그 중에서 "천애윤락"을 읽다보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습니다.  성석제 (2002) 천애윤락. In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pp. 42–75). 창비. 책에서 천애윤락을 소개하더군요. 호(號)는 향산거사(香山居士)요, 자(字)는 낙천(樂天)인  백거이(白居易) 가 남긴  「비파행(琵琶行)」 에 나오는 문구라고 하더군요. 덕분에 이리저리 검색하면서 비파행의 아름다운 문체와 그 애뜻한 내용에 흠뻑 빠졌습니다. 아쉽게도 이 글은 비파행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꼭 직접 검색해서 찾아보세요. 인공지능도 도움을 줄 겁니다. 탐색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겁니다. 꼭 해 보세요. 저는 내용 중에서도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천애윤락인(天涯淪落人)' 이라는 표현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이 한 구절을 곱씹으면서, 임마누엘 칸트의 '경계' 개념, 그리고 시스템사고에서 말하는 '시스템 경계(boundary)'의 의미까지 생각의 오지랖이 뻐쳤기 때문입니다.  경계에 선 사람들 '천애(天涯)'는 하늘과 물가라는 뜻이 결합한 것으로 문자 그대로 '하늘의 끝'을 뜻합니다. 자연스럽게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학에서는 더 이상 갈 곳도, 돌아갈 곳도 없는, 돌봐 줄 이 없는 한계선 을 뜻으로 주로 사용합니다. 천애고아(天涯孤兒)가 대표적이죠. '윤락인(淪落人)'은 물에 빠진다는 뜻과 떨어진다는 뜻이 결합해서 물에 빠져 가라앉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회적 몰락, 고립, 주변화를 겪고 있는 사람, 영어로 표현하면 marginalized, 혹은 더 이상 밀려날 곳 없는 존재 를 뜻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백거이의 비파...

하이데거, 서정주, 그리고 시스템사고: 성취와 태도의 경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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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데거, 미당 서정주, 그리고 시스템사고: 성취와 태도의 경계에서 1. 위대한 사유의 그림자 우리는 위대한 사유를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 대신 새로운 사유의 거친 길을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뒤따르는 우리는 좀 더 편하게 사유의 길을 산책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이 글에서 소개하는 마르틴 하이데거는 20세기 철학의 지형을 바꾼 인물입니다. 그는 존재라는 물음을 철학의 중심으로 끌어올렸고, 도구적 이성에 경종을 울리며 인간 삶의 근본 조건을 묻는 사유를 펼쳤습니다. 한국에서도 그의 언어철학은 문학과 예술, 교육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국 문학사에서는 미당 서정주가 이와 유사한 지위를 차지합니다. 그의 시는 한국어의 정서를 가장 아름답게 구사한 절창이라 평가 받습니다. 시어 하나하나에 스며든 고유한 리듬과 감성은 지금도 많은 시인들에게 기준점이 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한 가지 질문 앞에서 멈춰 섭니다. “그토록 위대한 사유와 표현을 가능하게 했던 이들은, 왜 그렇게 어두운 태도를 선택했는가?” 하이데거는 나치 체제에 협력했고, 그 선택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총장으로서 정권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이어갔습니다. 서정주는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문학을, 해방 이후에는 권력 찬양을 지속했습니다. 위대한 성취, 그리고 무거운 그림자. 우리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2. 성취를 지워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 “하이데거 없이는 현대 존재철학이 가능했겠는가?” “서정주의 시 없이는 한국 문학이 그 수준에 도달했겠는가?” 위와 같이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들의 성취를 그들의 과오로  지워버려선 안 된다는 안타까움, 분명 이해할 만합니다. 3. 그러나 성취는 유일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반대로 묻겠습니다.  정말 그들만이 그 길을 열 수 있었을까요? 하이데거와 거의 같은 시기, 장 폴 사르트르와 가브리엘 마르셀도 존재와 실존을 철학...

이등변 삼각형 게임과 시스템사고 (2) - 연결성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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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스템사고 팟캐스트] 음성으로 요약본을 들어 보세요(7분 06분). (클릭) 해적선, 이등변 삼각형 게임, 그리고 ‘완벽한 하루’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지난번 글에서 이등변 삼각형 게임을 통해 ‘지렛대 효과(Leverage)’를 알아봤다면, 오늘은 ‘연결성(Connectivity)’ 을 다루면서, 더 나아가 “왜 부분 최적이 전체 최적이 되지 못하는가?” 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언젠가부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 지극히 당연한 미덕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좋죠. 누가 봐도 칭찬받을 성실함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최근 이등변 삼각형 게임에서 느낀 깨달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앞서 소개한 규칙과 진행 방식에 익숙하다는 전제하에, 게임 도중에 외치는 두 가지 추임새(“각자 최선을 다하세요!”와 “천천히 움직이세요. 다칩니다!”)가 어떤 의미를 갖고, 그 속에서 왜 ‘전체’가 흔들리는지, 그리고 상위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함께 짚어볼게요.  이전 글:  이등변 삼각형 게임과 시스템사고 (1) - 지렛대 효과  1. ‘각자 최선을 다해 주세요!’ - 부분 최적의 역설 이등변 삼각형 게임에서, 저는 종종 참가자들에게 **“각자 최선을 다해주세요!”**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모두가 자기 기준(두 명과의 이등변)을 지키려고 열심을 내면 낼수록, 그룹 전체는 더욱 요동 치는 모습을 보이죠. 왜 그럴까요? 연결성 때문입니다. 나만의 부분 목표(“두 사람 사이에서 삼각형을 만들기”)에 최선을 다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도 각자 기준에 따라 움직이면 서로 얽히며 의도치 않은 ‘출렁임’이 발생합니다. 현실에서도 부서별 성과(부분 최적)을 극대화하려다 보면, 오히려 회사 전체(전체 최적)에 갈등과 비효율이 생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1) 부분 최적 노력이 상위 시스템 관심을 줄인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깊은 ...

Fishery Game과 내쉬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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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shery Game과 내쉬 균형 “전략이 아니라 구조가 행동을 만든다” Fishery Ltd. Game(이하 피셔리 게임)을 해보면, 누구도 악의를 품지 않았는데도 어장(공유 자원)은 고갈 됩니다. 참가자들은 각자 합리적인 결정을 했지만, 결과는 공멸 이었죠.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모든 팀이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최선을 다해 전략을 세웠는데… 결과는 참담한 자원 고갈.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 질문은 단순한 ‘전략의 실패’가 아니라, ‘구조가 행동을 결정한다’는 시스템사고의 시선으로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전에 잠시 게임이론의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 이란 개념으로 엿볼 수 있습니다.  🤔 모두가 합리적인데 왜 모두가 실패할까? 이런 결과는 게임이론의 대표 개념인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내 전략을 바꿔봐야 손해이고, 남도 마찬가지인 상태 → 이것이 바로 ‘내쉬 균형’입니다. 쉽게 말해, 모두가 자기 입장에서는 더 이상 전략을 바꿀 유인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때의 전략 조합이 바로 **‘균형’**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 모두가 최선을 골랐는데 결과는 최악일 수 있는 구조. ✔ 그게 바로 죄수의 딜레마이고, 바로 Fishery Game에서 우리가 겪은 상황입니다. 이 개념은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수학자 존 내쉬(John Forbes Nash, Jr., 1928~2015)가 제안한 것입니다. 그는 영화 A Beautiful Mind 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하지요.  내쉬 균형을 설명하는 다양한 문장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 “모두가 전략을 바꿔봐야 손해이므로 움직이지 않는 상태” B. “다른 사람 전략에 영향 받고, 나도 영향 주는 구조 속에서 최선이라고 믿는 선택” C. “개인이 똑똑해서라기보다, 불신과 협력 유인 부재라는 구조의 산물” D. “모두 개별 최적을 추구한 끝에, 집...

칸트의 초월 철학과 시스템사고: 조건을 묻는 사유로서의 작동원리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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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사고 팟캐스트] 음성으로 요약본을 들어 보세요. (7분24초) 클릭 시작하며: 사유의 요지경 속에서 “시스템은 왜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는가?” 이 단순해 보이는 질문 하나가 나를 오래 붙들었습니다. 시스템다이내믹스를 배우면서, 그리고 가르치면서, 작동원리 사고(operational thinking)는 늘 저에게 이상한 요지경 같았습니다. 작동 방식이란 게 단지 메커니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 아래에서 그렇게 ‘보이게 되는가’를 묻는 철학적인 사유까지 포함한다는 걸 조금씩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문득 칸트가 떠올랐습니다. “어떻게 그런 인식이 가능한가?”라는 그의 질문은, 시스템다이내믹스가 던지는 질문과 무척 닮아 있었습니다. 이 에세이는, 이 둘이 만나는 그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세 층위의 사유: 현상, 구조, 조건 시스템을 바라보는 사유에는 적어도 세 가지 층위가 존재합니다. 현상적 층위 :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보이는 현상, 드러난 변화. 구조적 층위 : “왜 그런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가?” 그 현상을 낳는 피드백 구조와 변수들. 조건적 층위 : “그 구조는 왜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가?” 구조가 작동하도록 만드는 더 깊은 조건들. 이 조건적 층위를 탐색할 때, 우리는 단지 시스템 내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경계 에 서서 그 시스템을 가능하게 만든 배경, 가치, 맥락을 사유하게 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철학이 시스템사고와 만납니다. 칸트와 시스템사고: 조건을 묻는다는 것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습니다. 이 질문은 단지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런 방식으로 알게 되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그는 세계 바깥을 논하지 않습니다. 세계가 나에게 어떻게 경험으로 나타나는가 , 그 조건을 묻습니다. 시스템사고의 작동원리 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왜 이 시스템은 이런 행동을 하는가?”를 묻다가, 어느 순간 “...

숫자에 흔들리다: 시스템사고 전문가의 부끄러운 고백

 시스템사고를 가르치는 내가 정작 시스템사고의 함정에 빠지다니. 오늘 파리 마라톤을 앞두고 마지막 의미 있는 훈련을 마쳤다. 8.86km를 집에서 호수공원 왕복으로 달리면서, 마라톤에서 적용할 5km마다 2분씩 쉬는 전략을 다시 한번 시험해봤다. 운동 자체는 만족스러웠다. 다양한 페이스로 달리며 심박수 반응을 살폈고, 의도적으로 멈춰 쉬었을 때 심박수가 빠르게 회복되는 것도 확인했다. 그런데 운동을 마치고 기록을 확인한 순간, 내 마음이 무너졌다. "VO2max: 44" 단 하나의 숫자가 나를 흔들어놓았다. 지난 몇 달간 45를 유지해오던 내 VO2max가 45에서 44로 떨어진 것이다. VO2max는 최대 산소 섭취량으로 산소(O2)의 부피(Volume)이 최대치라는 의미로 운동중 심폐 능력과 지구력을 나타내는 정량적인 지표로 사용된다. 작년에 44에서 45로 상승한 것을 나는 훈장처럼 여겼다. 그래서 이성적으로는 1 포인트 감소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은 다른 말을 했다. "뭐지? 컨디션이 안 좋아진 건가? 마라톤을 앞두고 체력이 떨어지고 있는 건가?" 순간, 시스템사고를 가르치는 전문가로서 깊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말했던가? "우리는 시스템의 행동을 단편적인 데이터 포인트(현상)가 아닌, 패턴과 구조를 통해 이해해야 합니다." "저량(stock)의 순간적인 변화에 집중하기보다, 흐름(flow)의 방향과 패턴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삶은 미분으로 살고 적분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순간의 적분값에 일희일비하지 마세요." 시스템사고자의 자기모순 호수를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이 모순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왜 나는 내가 가르치는 원칙을 실제 삶에 적용하는 데 실패했을까? 첫째, 나는 '숫자의 유혹'에 빠졌다. 시스템은 복잡하지만, 숫자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