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서만 보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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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2002) 천애윤락. In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pp. 42–75). 창비.
책에서 천애윤락을 소개하더군요. 호(號)는 향산거사(香山居士)요, 자(字)는 낙천(樂天)인 백거이(白居易)가 남긴 「비파행(琵琶行)」에 나오는 문구라고 하더군요. 덕분에 이리저리 검색하면서 비파행의 아름다운 문체와 그 애뜻한 내용에 흠뻑 빠졌습니다. 아쉽게도 이 글은 비파행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꼭 직접 검색해서 찾아보세요. 인공지능도 도움을 줄 겁니다. 탐색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겁니다. 꼭 해 보세요.
저는 내용 중에서도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천애윤락인(天涯淪落人)'이라는 표현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이 한 구절을 곱씹으면서, 임마누엘 칸트의 '경계' 개념, 그리고 시스템사고에서 말하는 '시스템 경계(boundary)'의 의미까지 생각의 오지랖이 뻐쳤기 때문입니다.
경계에 선 사람들
'천애(天涯)'는 하늘과 물가라는 뜻이 결합한 것으로 문자 그대로 '하늘의 끝'을 뜻합니다. 자연스럽게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학에서는 더 이상 갈 곳도, 돌아갈 곳도 없는, 돌봐 줄 이 없는 한계선을 뜻으로 주로 사용합니다. 천애고아(天涯孤兒)가 대표적이죠.
'윤락인(淪落人)'은 물에 빠진다는 뜻과 떨어진다는 뜻이 결합해서 물에 빠져 가라앉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회적 몰락, 고립, 주변화를 겪고 있는 사람, 영어로 표현하면 marginalized, 혹은 더 이상 밀려날 곳 없는 존재를 뜻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백거이의 비파행에는 세 명의 '윤락인'이 등장합니다.
강가의 뱃사공, 유배된 시인 자신, 그리고 비파를 연주하는 여인.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의 가장자리, 즉 경계에 서 있는 인물들입니다. 성석제의 소설에도 이 경계에 있는 사람으로 주인공의 친구, '정환'이 등장합니다.
경계에서만 보이는 것들
시스템사고 관점에서 인생살이는 매 순간의 삶(Flow)과 그것이 쌓여서 만들어진 결과(Stock)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는 'Stock', 즉 쌓인 결과로 평가하지만, 사실 매일매일의 선택(Flow)이 모여 우리의 건강, 평판, 관계,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Flow와 Stock은 쌍을 이루는데, 여러 개의 Stock-Flow 쌍이 연결된 것이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스템은 복잡계 특징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시스템 전체가 잘 안 보입니다. 마치 나무만 보면 숲이 안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숲을 보려면 숲 밖에 나와야 합니다. 즉, 숲이라는 경계를 확인해야 숲이 보일 수 있습니다. 당연히 경계에 서게 되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학에서도 경계를 중요하게 다루는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천애의 지점에 다다를 때, 우리는 삶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을 얻는다고나 할까요. 백거이의 "천애윤락인"과 연결한다면, 천애(天涯)는 단순한 한계가 아니라 경계의 성격을 가집니다. 그곳에 선 이들은 사회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특별한 시점을 갖게 됩니다. 윤락(淪落)은 어쩌면 사회적 경계를 '초월'하여 다른 존재 방식으로 들어간 상태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아마 그 둘은 경계에 서 보니 '인생무상'을 느꼈을 겁니다. 제가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수년간 같이 지내면서 그 생명의 한계를 마지막 숨소리로 지켜보는 상황처럼 말입니다.
철학에서 경계를 유독 강조한 철학자로 칸트가 유명합니다. 칸트는 인간 이성의 경계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는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강조하면서, 그 경계에 서서 그 너머를 꿈꾸는 사유를 시작했습니다. 경계란 끝이 아니라, 초월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칸트가 구별하고 있는 한계, 경계, 초월(적) 개념을 알아볼까 합니다.
등산과 국경을 넘는 상황을 생각해 볼까요?
- 한계(Schranke): 당신의 체력이 다한 지점은 한계입니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입니다. "여기까지입니다." 라는 표지판 같은 느낌입니다.
- 경계(Grenze): 산 정상에 섰을 때, 당신은 올라온 쪽과 너머의 풍경을 모두 볼 수 있는 경계에 있습니다. 이 지점은 단순히 등산의 끝이 아니라, 두 세계(산의 이쪽과 저쪽)를 연결하는 접점입니다. 마치 두 나라 사이의 국경선처럼 양쪽을 모두 볼 수 있는 위치를 말합니다.
- 초월적(Transzendental): 등산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지도를 읽는 능력, 방향 감각, 균형 감각—은 초월적 요소입니다. 이것들은 등산 경험의 대상이 아니라, 등산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입니다. 그래서 국경을 인식하고 건너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여권이나 비자 시스템을 의미하겠죠.
- 초월(Transzendent): 인간이 산소통 없이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것은 인간 능력을 초월합니다. 이는 가능한 인간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국경을 넘어가는 행위나, 국경을 초월하는 세계 시민의식 같은 것입니다.
칸트는 인식(Erkenntnis)과 생각(Denken)을 다르게 다뤘습니다.
『순수이성비판』 제2판 서문(B Preface)에서 칸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Wir können uns viele Dinge denken, die wir nicht erkennen können."
(우리는 인식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
신, 종교 영역은 논리적으로 실증적으로 '인식'할 수 없지만, 그 개념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한계를 초월하는 것은 이성으로 따질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겁니다. 문학처럼.
인식과 생각을 인과관계와 상관관계에 빗대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다음 링크로 옮겨 타 보세요.
(인과관계와 상관관계에 대한 인식론적 해설- 칸트의 인식과 생각과의 연결 https://bit.ly/Causality-Kant )
백거이의 "천애윤락인"으로 돌아가면, 천애(天涯)라는 경계에 선 이들이 오히려 일상의 제약에서 벗어나 더 깊은 통찰과 공감을 나눌 수 있었던 것처럼, 인식의 경계에 서는 것은 제한이 아닌 새로운 시각과 자유의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한계를 자각한 자만이 얻는, 책임 있는 자유 』
이것이 칸트 철학의 정수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학에서는 '책임'이라는 단어를 슬쩍 빼놓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범생이 칸트의 철학에서 '책임'이라는 개념은 칸트 철학의 심장부를 건드리는 개념인데, 칸트에게 자유란, "내 마음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라, "도덕 법칙에 스스로 복종하는" 자유이고 방종(Lizenz)과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하지만, 문학 만큼은 이 책임에서도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한 번쯤은 그렇게 해 봐야 '책임'의 무거움과 소중함을 새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문학은 시스템사고(시스템다이내믹스)에서 다루는 시뮬레이션과 닮았습니다. 실제 현실에서 도시를 파괴하고 사람을 죽이고 감염병이 창궐하면 큰일 나지만 시뮬레이션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거든요. 시뮬레이션의 종착역은 성찰이고 학습입니다. 마찬가지로 문학도 그렇지 않나요?
바로 둘 다 경계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굳이 칸트식의 '책임'있는 자유라는 돋보기를 들이 댈 필요는 없습니다. 그대로 느껴본 후 방종이니 아니니 논쟁하는 것은 독자 몫입니다.
시스템사고의 관점에서 본 경계
시스템사고에서도 '경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시스템 경계란, 무엇을 내부로 보고 무엇을 외부로 볼 것인지를 정하는 선입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 어디까지를 문제로 포함할지,
- 어디서 선을 그을지, 이 경계 설정이 분석 결과를 완전히 바꿔 놓습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시스템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전체를 더 명확히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스템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시스템에 너무 익숙해져 그 한계나 문제를 잘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경계에 밀려난 사람들 — 즉 '천애윤락인'들은, 전체 시스템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특권적 시선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기존과 다른 해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경계에서 얻는 깨달음
복잡한 시스템에서는 계획대로 일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
원래 시스템이 서로 얽혀 있고 지연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대 사회는 '너만 잘해라'고 말합니다. 각자 자기 역할에만 몰두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부분 최적을 추구하면 전체 최적은 오히려 무너집니다. 시스템사고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 "당신은 지금 어느 경계 안에 살고 있습니까?"
- "당신은 전체를 보고 있습니까?"
칸트가 인간 이성의 경계에 서서 새로운 철학 지평을 열었듯, 시스템사고를 하려는 저는 시스템의 경계에 서서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천애윤락인, 그리고 시스템사고자의 자세
비파행에서 백거이와 비파 여인은 같은 처지였기에 공감했습니다. 그러나 그 공감은 단순히 불행을 공유한 것만은 아닙니다. 경계에 서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시선과 감성을 공유한 것입니다.
시스템사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스템의 중심부에 안주하지 않고, 때로는 경계에 서서 시스템 전체를, 시스템의 한계를, 그리고 변화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천애윤락인'의 시선은 고통스럽지만, 바로 그 시선이야말로 시스템을 새롭게 이해하고 혁신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결론: 경계에 서서, 새롭게 본다는 것
경계에 선다는 것은 두렵습니다.
하지만 경계에 서야만, 우리는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경계에 서야 비로소 변화의 가능성, 초월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사고자는 흐름과 저량, 경계와 연결을 이해하며, 늘 묻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시스템 안에 있으며,그 시스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선택하고 있는가?"
'천애윤락인'은 끝에 선 자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보기 시작한 자입니다. 그리고 그 특별한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 나갑니다.
이렇게 멋지게 마무리했는데, 성석제의 '천애윤락' 소설을 보면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이 소설에서의 천애윤락인은 정말 찐따같거든요. 천애윤락인? 그렇게 멋있지만은 않습니다. 그를 바라보고 돌보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어쩌라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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