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제도와 시스템사고: 세종대왕의 조세제도 개혁에서 배우는 구조적 경청의 리더십


제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면 빠른 해결책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스템 문제는 단순한 처방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시스템사고는 문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충분한 논의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을 중요시합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접근법이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이유로 현대인들에게 부적합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이런 방식은 우리 역사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조선시대 '경연(經筵)' 제도를 통해 시스템 문제 해결의 지혜를 살펴보려 합니다. 특히 세종대왕이 경연을 통해 조세제도를 어떻게 개혁했는지 알아보면서, 현대 시스템사고의 원리와 놀랍도록 닮아있는 우리 전통의 지혜를 재발견하려 합니다.

경연제도의 역사: 집단지성의 전통

경연(經筵)은 글자 그대로 “경전을 펼쳐놓는 자리”라는 뜻으로, 왕과 신하가 함께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공부하고 국정을 논의하던 제도였습니다. 고려 인종 때 시작되어 공민왕 때 정례화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 더욱 체계화되었습니다.

특히 세종대왕 시기에 전성기를 맞았는데,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즉위 32년 동안 약 1,900회 내외의 경연을 열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세종이 얼마나 토론과 집단지성을 중시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경연은 단순한 강독 자리가 아니라, 왕과 신하가 서로의 견해를 개방적으로 공유하고 비판을 주고받는 공간이었습니다. 이는 시스템사고에서 강조하는 다양한 관점의 경청과 합의 기반 문제 해결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종의 경연 운영 방식: 시스템사고의 원형

세종의 경연은 몇 가지 특징적인 운영 방식을 보였습니다:

  1. 개방성: “벼슬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말고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라”고 지시하며 다양한 관점을 존중했습니다.
  2. 지속성: 한 사안을 여러 차례 논의하면서 충분한 숙의를 거쳤습니다.
  3. 통합적 관점: 현전 학자, 의정부 대신, 지방관 등 다양한 전문가의 의견을 경청하고 통합했습니다. 이는 시스템사고가 말하는 관점의 다양성·지속적 탐구·통합적 시각과 일치합니다.


세종의 조세제도 개혁: 공법(貢法) 제정 과정

세종 시대의 대표적인 시스템 개혁 사례로 조세제도 개혁, 특히 공법(貢法)의 제정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조선의 조세제도는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1. 문제 인식 단계

세종 초기, 조세제도는 고려 이래 시행되던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이 제도는 매년 관리가 농지를 직접 조사(답험)하여 작황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실제 운영에서 여러 문제가 있었습니다:

  • 지방관들의 자의적 판단으로 백성들의 부담이 가중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매년 조사해야 하는 행정적 비효율성이 컸습니다
  • 조사관의 부정부패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세종은 이러한 문제를 여러 차례 경연에서 논의하며, 조세제도가 단순한 세금 징수의 문제가 아니라 농민의 생활, 지방 행정, 국가 재정이 얽힌 복잡한 시스템 문제임을 인식했습니다.

2. 다양한 관점 수렴 과정

세종은 조세제도 개혁을 위해 다양한 관점을 수렴했습니다:

  • 현장 조사: 세종 7년(1425년)부터 각 도의 토지 상황을 조사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는 문제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 전문가 의견 청취: 경연에서 농업과 행정에 밝은 신하들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특히 황희, 맹사성 등 경험 많은 신하들과 실무 관료들의 의견을 두루 참고했습니다.
  • 민의 존중: 세종은 “백성이 불가라 하면 아직 시행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1430년에는 전국 17만 명이 참여한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찬성 57%, 반대 43%) 세종은 "백성의 형편"을 자주 언급하며, 개혁이 실제 농민들에게 미칠 영향을 중요하게 고려했습니다. 이는 시스템 변화가 모든 이해관계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는 시스템사고의 원칙과 일치합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백성들의 고충을 듣지 않고 정책을 만드는 것은 눈을 감고 길을 가는 것과 같다"라는 취지의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합니다. 이는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관점을 중요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3. 길고 깊은 논의의 과정

공법 논의는 세종 9년(1427년) 공법 책문 출제를 기점으로 본격화되어, 세종 26년(1444년) 최종 확정까지 17년간 이어졌습니다. 이는 현대의 시간 감각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긴 논의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풍흉 기준 고정세율 vs. 변동세율, 지역 차등화, 행정 비용 문제 등이 집중 논의되었습니다.

  • 평년작 기준 고정세율 vs. 매년 작황 조사: 공법의 핵심은 토지의 등급을 미리 정해두고 평년작을 기준으로 고정 세율을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풍흉에 관계없이 동일한 세율을 적용하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반대 의견도 많았습니다.
  • 지역별 차등화: 각 지역의 토질과 기후 조건이 달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 행정 비용과 효율성: 매년 조사하는 방식보다 고정세율이 행정 비용을 절감할 수 있지만, 정확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세종은 경연을 통해 찬성과 반대 의견을 모두 경청하고, 각 관점이 가진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시스템 전체의 개선을 목표로 했습니다.

4. 정책 실험과 점진적 실행

  • 세종 19년(1437)년: 1차 공포(1결 12~20말) → 흉년과 반발로 곧 유보.
  • 세종 22~23년(1440~41년): 경상·전라·충청 일부 지역 시범 시행 → 하등전 부담 증가로 민심 반발, 곧 세율 조정.
  • 세종 25년(1443년): 재설계(토지 5등급, 연분 9등급).
  • 세종 26년(1444년): 전분 6등·연분 9등 공법 최종 확정.

이후 전국 시행은 1450~1489년에 걸쳐 도별로 단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즉, 제도 확정까지는 17년, 전국적 정착까지는 45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처럼 점진적인 접근법은 복잡한 시스템 변화를 관리하는 현명한 방식입니다. 현대 시스템사고에서도 강조하는 '지연(Delay)' 효과를 인정하고, 시스템이 변화에 적응할 시간을 주는 접근법입니다.

5.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조정

세종은 시행 후에도 풍흉 기준, 세율 인하, 측량 방식 개선(周尺 사용) 등 지속적으로 보정했습니다. 정책 수립 과정에서도 측우기(세종24년,1442년)를 발명·보급하여 정책 근거를 데이터 기반으로 보완했습니다.

시스템사고 관점에서 본 경연과 공법 개혁

세종의 경연과 공법 개혁은 현대 시스템사고의 여러 개념과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 다양한 관점 수렴: 경연은 황희·맹사성 같은 원로 대신, 집현전 학자, 지방 관료, 심지어 17만 명이 참여한 국민투표까지 아우르며 다층적 관점을 구조적으로 모아냈습니다. 이는 이해관계자 전반의 의견이 시스템 내부로 들어오는 과정이었습다.
  • 지연(Delay): 제도 논의 착수(1427) → 최종 확정(1444)까지 17년, 전국 시행 완료까지 45년이 걸렸습니다. 이러한 시간 지체는 시스템이 변화를 흡수하고 적응하는 데 필요했던 필연적 딜레이였습다.
  • 정신 모델(Mental Model): 맹자의 정전제라는 이상적 모델은 조선 현실에 맞지 않다고 판단했지만, “인정(仁政)은 토지 제도 바로잡음에서 시작된다”는 사고틀은 그대로 정책 설계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즉, 이념적 모델과 현실적 대안의 긴장 속에서 공법이 탄생했습다.
  • 정책 지렛대(Leverage): 기존 답험손실법의 불공정 구조를 건드리는 대신, 토지 비옥도·연분 등급화라는 단순화·표준화 장치가 핵심 지렛대로 작동했습니다. 특히 측우기 도입은 데이터 기반의 작은 변화가 큰 제도적 신뢰를 확보하는 지렛대 역할을 했습니다.
  • 구조적 변화의 공식화(Formalization): 공법은 단순한 행정 조치가 아니라, 『경국대전』 호전에 수록되어 제도·법규로 공식화된 구조적 변화였습니다. 이 공식화는 제도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보장하면서, 후대(성종·영조 대)에도 재검토·수정 가능한 틀을 제공했습니다. 

세종의 경연에서 배우는 현대 시스템사고의 교훈

세종의 경연을 통한 조세제도 개혁 사례는 현대 시스템사고에 여러 교훈을 줍니다:

  1. 가치 중립적 관점: 세종은 조세제도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운영되느냐가 중요하다는 관점을 가졌습니다. 이는 "시스템은 가치 중립적이다"라는 현대 시스템사고의 원칙과 일치합니다.
  2. 다양한 해석 존중: 세종은 신하들의 다양한 의견을 경청했고,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관점들이 충돌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이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시스템사고의 원칙을 실천한 것입니다.
  3. 합의를 통한 해결: 세종의 조세제도 개혁은 일방적인 결정이 아니라, 경연을 통한 지속적인 논의와 합의의 산물이었습니다. 이는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할 때 다양한 관점을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는 시스템사고의 접근법과 일맥상통합니다.
  4. 시간의 가치 인정: 세종의 17년에 걸친 개혁 과정은 시스템 변화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 사례입니다. 이는 현대 시스템사고에서 강조하는 '지연(Delay)'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결론: 빠름보다 중요한 깊은 토론의 가치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종종 빠른 해결책을 추구하며 시스템의 복잡성을 간과합니다.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라는 구호 아래, 충분한 논의와 합의의 과정을 생략하곤 합니다.

그러나, 세종의 경연과 공법 개혁은 빠른 해결책보다 깊은 토론과 합의를 중시한 사례입니다. 17년에 걸친 숙의, 45년에 걸친 지연 시행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 시스템 변화에 필요한 적응의 시간이었습니다.

오늘의 리더들에게도 질문이 남습니다.

  • 얼마나 다양한 의견을 구조적으로 수렴하는가?
  • 빠른 결정보다 지연을 견디며 숙의하는 과정을 존중하는가?

세종의 경연처럼, 우리도 복잡한 문제 앞에서 서두르지 말고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며 합의적 해결을 모색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시스템사고의 정신이며, 우리 선조들이 물려준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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