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서정주, 그리고 시스템사고: 성취와 태도의 경계에서

 

하이데거, 미당 서정주, 그리고 시스템사고: 성취와 태도의 경계에서


1. 위대한 사유의 그림자

우리는 위대한 사유를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 대신 새로운 사유의 거친 길을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뒤따르는 우리는 좀 더 편하게 사유의 길을 산책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이 글에서 소개하는 마르틴 하이데거는 20세기 철학의 지형을 바꾼 인물입니다. 그는 존재라는 물음을 철학의 중심으로 끌어올렸고, 도구적 이성에 경종을 울리며 인간 삶의 근본 조건을 묻는 사유를 펼쳤습니다. 한국에서도 그의 언어철학은 문학과 예술, 교육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국 문학사에서는 미당 서정주가 이와 유사한 지위를 차지합니다. 그의 시는 한국어의 정서를 가장 아름답게 구사한 절창이라 평가 받습니다. 시어 하나하나에 스며든 고유한 리듬과 감성은 지금도 많은 시인들에게 기준점이 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한 가지 질문 앞에서 멈춰 섭니다.
“그토록 위대한 사유와 표현을 가능하게 했던 이들은, 왜 그렇게 어두운 태도를 선택했는가?”

하이데거는 나치 체제에 협력했고, 그 선택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총장으로서 정권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이어갔습니다.
서정주는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문학을, 해방 이후에는 권력 찬양을 지속했습니다.

위대한 성취, 그리고 무거운 그림자. 우리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2. 성취를 지워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

“하이데거 없이는 현대 존재철학이 가능했겠는가?”
“서정주의 시 없이는 한국 문학이 그 수준에 도달했겠는가?”

위와 같이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들의 성취를 그들의 과오로  지워버려선 안 된다는 안타까움, 분명 이해할 만합니다.


3. 그러나 성취는 유일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반대로 묻겠습니다. 
정말 그들만이 그 길을 열 수 있었을까요?

하이데거와 거의 같은 시기, 장 폴 사르트르와 가브리엘 마르셀도 존재와 실존을 철학의 중심 주제로 다뤘습니다. 이들은 나치에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판하고 저항했습니다. 그들의 철학은 하이데거의 영향을 일부 받았지만, 독자적으로 풍부하게 발전했습니다.

서정주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김소월, 한용운, 윤동주, 이육사 역시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남겼습니다. 이 중에서 특히 한용운, 윤동주, 이육사는 일제에 저항하며, 고통과 억압을 감내하면서도 한국 문학의 품격을 높였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대안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이데거나 서정주가 아니었다면, 다른 이들이 다른 방식으로 그 자리를 채웠을 것입니다. 그들의 성취가 위대하다고 해서, 그 길이 유일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업적이 영향을 준 역사와 영향을 주지 않은 역사 중에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 평할 수 없습니다. 역사는,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들의 성취가 없어진다고 애닳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항상 대안이 있으니까요. 

따라서, “그들이 없었으면 어찌 될 뻔 했어!” 라는 말로 그들의 존재를 변호할 생각은 말아 주세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다양한 선택을 용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것이 옳은지는 신 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절대 진리라고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해석을 선택할 것인가는 각자의 가치 판단에서 나옵니다. 그 판단이 대다수의 공감을 받을 때 공동의 선으로 평가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공감 받는 과정 공감하는 과정이 대화이고 소통입니다. 이 글은 제 개인적인 가치 판단에 따른 선택을 소개하고 공감을 받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저는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깊은 감명을 받고 저의 시스템사고에 접목하려고 합니다. 저는 서정주의 조탁 능력에 감동을 받고 문학적 감수성을 키우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하이데거의 철학적 성취로 그를 용서하기는 싫습니다. 서정주의 문학적 성취로 그를 용서하기는 싫습니다. 

제가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자신들의 선택 때문에 그 당시 무수히 많은 폭력이 정당화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의 기준이고 저의 선택입니다. 

“그들의 사유에서 영감을 받지만, 그들의 선택 앞에서는 멈춰 선다. 선택은 책임이기에.”


4. 시스템은 가치중립적이다, 그러나 태도는 중립일 수 없다.

저는 강의할 때마다 늘 강조합니다.

시스템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시스템은 중립적이다.

말하자면 나치 정권이나 일제 식민지 통치는 그 자체로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누구에게는 좋은 것일테니까요. 그러나 그 시스템에 대한 나의 태도는 온전히 내 몫입니다.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전적으로 나의 가치 판단에 따른 선택입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중립적일 수 있지만, 그가 나치 체제에 복무한 태도는 결코 중립일 수 없습니다.
서정주의 시는 중립적으로 감상할 수 있지만, 그가 선택한 권력과의 밀착은 그의 선택 결과물이며 선택에 따른 책임도 감수해야 합니다. 


5. 시스템에 대한 태도의 책임

1990년 독일이 통일되었을 때, 많은 동독 사회과학자들이 해직당했습니다. 반면, 이공계 교수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보직이 유지되었습니다. 사회과학자들은 이공계 과학자와 달리 해석하고 가치 판단을 도와주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동독 사회과학자들은 단지 마르크스주의 연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특정 체제를 정당화하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서독이 흡수 통일한 이후에는 자리를 보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시스템은 중립적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행동했는가는 개인의 선택이며, 따라서 책임이 따릅니다.


6. 성실함은 무죄인가?

“나는 그저 맡은 자리에서 성실히 내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이 말이 무책임하게 들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집행자 아이히만은 재판에서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 이라 말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 모습을 보며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성실함이 반드시 윤리적 책임을 면제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 범죄라고까지 강조합니다.

이것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의 기업, 교육, 정치 구조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질문을 마주합니다.
“내가 속한 시스템은 정당한가? 나는 어떤 태도를 선택하고 있는가?”


7. 시스템사고는 구조를 넘는다

시스템사고는 단지 구조를 분석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구조가 가치 중립적이다보니 구조를 해석하는 방식도 다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이어가면 다음과 같은 사유를 하게 됩니다. 

1. 시스템은 가치 중립적이다. 

2. 따라서 다양한 해석 & 태도가 가능하다. 그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 (그럴 수 있겠구나!)

3. 다양한 해석 & 태도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는 내 몫이다. 따라서, 내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는 변명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태도는 내가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스템다이내믹스 & 시스템사고는 구조에 대해 당신은 어떤 태도를 선택할지를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은 어떤 시스템 안에 살고 있으며, 그 시스템에 어떤 태도를 선택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철학, 문학, 역사 등 인문학에서 다양한 가치 판단 사례를 지켜보고 선택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 상황에 처했을 때 어땠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나라면?'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경연제도와 시스템사고: 세종대왕의 조세제도 개혁에서 배우는 구조적 경청의 리더십

무기력을 이기는 시스템사고 (1) — 태도와 전략 사이에서

Fishery Game과 내쉬 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