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초월 철학과 시스템사고: 조건을 묻는 사유로서의 작동원리 사고


시작하며: 사유의 요지경 속에서

“시스템은 왜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는가?” 이 단순해 보이는 질문 하나가 나를 오래 붙들었습니다. 시스템다이내믹스를 배우면서, 그리고 가르치면서, 작동원리 사고(operational thinking)는 늘 저에게 이상한 요지경 같았습니다. 작동 방식이란 게 단지 메커니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 아래에서 그렇게 ‘보이게 되는가’를 묻는 철학적인 사유까지 포함한다는 걸 조금씩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문득 칸트가 떠올랐습니다. “어떻게 그런 인식이 가능한가?”라는 그의 질문은, 시스템다이내믹스가 던지는 질문과 무척 닮아 있었습니다. 이 에세이는, 이 둘이 만나는 그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세 층위의 사유: 현상, 구조, 조건

시스템을 바라보는 사유에는 적어도 세 가지 층위가 존재합니다.

  • 현상적 층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보이는 현상, 드러난 변화.

  • 구조적 층위: “왜 그런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가?” 그 현상을 낳는 피드백 구조와 변수들.

  • 조건적 층위: “그 구조는 왜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가?” 구조가 작동하도록 만드는 더 깊은 조건들.

이 조건적 층위를 탐색할 때, 우리는 단지 시스템 내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경계에 서서 그 시스템을 가능하게 만든 배경, 가치, 맥락을 사유하게 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철학이 시스템사고와 만납니다.

칸트와 시스템사고: 조건을 묻는다는 것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습니다. 이 질문은 단지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런 방식으로 알게 되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그는 세계 바깥을 논하지 않습니다. 세계가 나에게 어떻게 경험으로 나타나는가, 그 조건을 묻습니다.

시스템사고의 작동원리 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왜 이 시스템은 이런 행동을 하는가?”를 묻다가, 어느 순간 “그 구조가 작동하도록 만든 전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시스템 안의 구조를 넘어서, 시스템 바깥의 맥락, 조건, 가치까지 사유하게 되는 것이죠. 이건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비판(critique)이며, 초월(transcendental)적 질문입니다.

포레스터에서 메도우즈까지: 기술에서 철학으로

시스템다이내믹스는 원래 산업 시스템을 시뮬레이션하기 위한 공학적 도구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도넬라 메도즈 박사 연구진이 『성장의 한계』(2004)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것은 결국 윤리적 사유, 정책 철학, 생태적 인식론으로 확장됩니다.

그러니 시스템다이내믹스의 진짜 가능성은 모델링 자체보다, “우리가 무엇을 모델링하고 있는가?”를 묻는 그 질문하는 태도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사례: 학교폭력과 학업성취도의 조건들

“학교폭력을 당한 학생은 학업 성취도가 떨어진다.” 이 명제는 단선적 인과입니다. 그러나 시스템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 안에는 여러 가능성이 숨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 스트레스 → 수면 질 저하 → 집중력 감소 → 성취도 하락:
    스트레스 → 수면의 질(-) → 집중력(+) → 성취도(+)

  • 반발심 → 회피 집중 → 학업 에너지(집중도) 증가 → 학업 성취 수준 증가 

  • 반발심 → 회피 성향(+) → 학업 에너지(집중도) (+) → 학업 성취 수준 (+)

이 모든 것은 그 학생이 어떤 심리적 자원을 갖고 있는가, 사회적 지지가 있는가, 어떤 교육 시스템 안에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과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조건적입니다. 이 조건을 묻는 순간, 우리는 시스템의 경계에서 철학의 경계로 발을 옮기게 됩니다.

방법론적 함의: 모델링도 철학이다

이런 사유는 시스템다이내믹스 모델링 자체에도 영향을 줍니다. 예를 들어,

  • 경계 설정은 철학적 판단이다: 어떤 요소를 포함하고 어떤 것은 제외하는가? 이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무엇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세계관의 반영입니다.

  • 변수의 명명과 해석: 변수 이름에 어떤 단어를 쓰는가, 그것이 가리키는 인식 틀은 무엇인가?

  • 루프 해석의 다층성: 같은 피드백 루프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을 낳습니다. 인과관계 자체가 해석적 조건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델링은 시스템 설계 이전에 세계관 설계이기도 합니다.

맺으며: 다시, 철학으로

이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시스템사고의 작동원리 사고는 칸트의 비판철학 이후 초월적 질문을 삶 속에 실천하는 현대적 방법 중 하나입니다.

어떤 구조가 왜 그렇게 작동하는가? 그 구조는 어떤 조건 위에서 작동 가능한가? 그리고 우리는 그 조건을 어디까지 물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들이야말로, 시스템사고자에게 필요한 철학적 감수성 아닐까요?

그래서 오늘도 저는 이렇게 자문해 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조건으로 두고 이 구조를 해석하고 있는가?”

그 물음이, 저의 시스템사고를 지탱하는 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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