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에 흔들리다: 시스템사고 전문가의 부끄러운 고백

 시스템사고를 가르치는 내가 정작 시스템사고의 함정에 빠지다니.

오늘 파리 마라톤을 앞두고 마지막 의미 있는 훈련을 마쳤다. 8.86km를 집에서 호수공원 왕복으로 달리면서, 마라톤에서 적용할 5km마다 2분씩 쉬는 전략을 다시 한번 시험해봤다. 운동 자체는 만족스러웠다. 다양한 페이스로 달리며 심박수 반응을 살폈고, 의도적으로 멈춰 쉬었을 때 심박수가 빠르게 회복되는 것도 확인했다.

그런데 운동을 마치고 기록을 확인한 순간, 내 마음이 무너졌다.

"VO2max: 44"

단 하나의 숫자가 나를 흔들어놓았다. 지난 몇 달간 45를 유지해오던 내 VO2max가 45에서 44로 떨어진 것이다. VO2max는 최대 산소 섭취량으로 산소(O2)의 부피(Volume)이 최대치라는 의미로 운동중 심폐 능력과 지구력을 나타내는 정량적인 지표로 사용된다. 작년에 44에서 45로 상승한 것을 나는 훈장처럼 여겼다. 그래서 이성적으로는 1 포인트 감소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은 다른 말을 했다.

"뭐지? 컨디션이 안 좋아진 건가? 마라톤을 앞두고 체력이 떨어지고 있는 건가?"

순간, 시스템사고를 가르치는 전문가로서 깊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말했던가?

"우리는 시스템의 행동을 단편적인 데이터 포인트(현상)가 아닌, 패턴과 구조를 통해 이해해야 합니다."

"저량(stock)의 순간적인 변화에 집중하기보다, 흐름(flow)의 방향과 패턴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삶은 미분으로 살고 적분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순간의 적분값에 일희일비하지 마세요."

시스템사고자의 자기모순

호수를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이 모순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왜 나는 내가 가르치는 원칙을 실제 삶에 적용하는 데 실패했을까?

첫째, 나는 '숫자의 유혹'에 빠졌다. 시스템은 복잡하지만, 숫자는 단순하다. 45에서 44로의 변화는 명확하고 단순한 데이터다. 우리 뇌는 단순한 숫자에 집착하고, 그것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시스템사고를 가르치면서도, 나는 숫자라는 간편한 지표에 의존하고 있었다.

둘째, 나는 '선형적 사고'의 함정에 빠졌다. VO2max 1 포인트 하락 = 체력 저하라는 단순한 등식을 만들었다. 하지만 실제 신체 시스템은 훨씬 복잡하고 비선형적이다. 테이퍼링 기간에는 오히려 일시적인 수치 하락이 더 강한 회복으로 이어질 수 있다.

셋째, 나는 '지연된 피드백'을 무시했다. 오늘의 VO2max는 지난 며칠 또는 몇 주 동안의 다양한 활동, 스트레스, 회복의 복합적 결과일 수 있다. 아마도 지난주 강도 높은 단체 훈련, 그리고 경북 경산까지의 장거리 출장과 강의, 그리고 그 사이의 회복이 오늘에서야 수치로 나타났을 수 있다.

미분과 적분 사이에서

런닝화를 벗고 샤워를 하며, 이전에 쓴 내 블로그 글이 떠올랐다.

"우리는 미분으로 살고 적분으로 드러난다. 매일의 작은 행동(미분)이 쌓여 우리의 상태(적분)를 결정한다."

그런데 정작 나는 적분에 해당하는 'VO2max 44'라는 하나의 지표에 집착하고 있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오늘의 훈련이 어떤 미분, 어떤 흐름이었는지에 대한 분석이었다.

  • 오늘 훈련에서 심박수 회복이 빨랐다는 점
  • 다양한 페이스 구간에서 적절한 심박수 반응을 보였다는 점
  • 5km마다 2분 휴식 전략이 실제로 효과적이라는 점을 확인했다는 점

이런 '흐름의 질'을 무시하고, 하나의 숫자에 내 감정을 맡겼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문득 인공지능에게 이 상황에 대한 의견을 물어봤다. 냉정한 데이터 분석가로서 AI는 명확했다.

"VO2max 수치는 '훈련 흐름의 스냅샷'일 뿐, 전체 상태를 의미하진 않아요. 오늘 특별한 훈련 목적(휴식 전략 테스트)을 고려할 때, 이런 변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시스템사고 관점에서 이것은 '지연된 피드백' 과정일 뿐입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인공지능이 나보다 더 나은 시스템사고자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데이터에 기반한 AI가 하나의 데이터 포인트에 흔들리지 않고 더 넓은 시스템 패턴을 볼 수 있었다.

교훈: 시스템을 읽는 어려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 경험에서 얻은 깊은 교훈을 곱씹었다.

시스템을 읽는 것은 정말 어렵다. 특히 그 시스템이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일 때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감정적 생물이고, 순간의 데이터에 휩쓸리기 쉽다. 시스템사고 전문가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미분(일상의 작은 행동)의 질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지만, 적분(누적된 결과)을 해석하는 방법 또한 배워야 한다. 특히 적분값의 일시적 변화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쩌면 시스템사고의 본질은 '평정심'에 있는지도 모른다. 순간의 변화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장기적 패턴과 구조에 집중하는 마음의 평화가 필요하다.

파리 마라톤을 향하여

이제 파리 마라톤이 5일 앞으로 다가왔다. VO2max 44든 45든, 그것은 단지 하나의 숫자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준비해온 시스템—훈련, 회복, 영양, 그리고 무엇보다 5km마다 2분씩 쉬는 전략—의 효과를 믿는 것이다.

마라톤에서는 순간의 데이터가 아니라, 42.195km를 완주하기 위한 접근이 필요하다. 적절한 페이스 조절, 계획된 휴식, 영양 보충,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대응할 수 있는 회복탄력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마라톤이 끝난 후에도, 100세까지 건강하게 달리기 위해서는 하나의 레이스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장기적 관점이 필요할 것이다.

미분으로 달리고, 적분으로 늙어간다. 하지만 때로는 적분의 순간적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 작은 깨달음이, 파리의 거리를 달리는 내 발걸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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