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변 삼각형 게임과 시스템사고 (2) - 연결성의 비밀
해적선, 이등변 삼각형 게임, 그리고 ‘완벽한 하루’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지난번 글에서 이등변 삼각형 게임을 통해 ‘지렛대 효과(Leverage)’를 알아봤다면, 오늘은 ‘연결성(Connectivity)’을 다루면서, 더 나아가 “왜 부분 최적이 전체 최적이 되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언젠가부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 지극히 당연한 미덕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좋죠. 누가 봐도 칭찬받을 성실함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최근 이등변 삼각형 게임에서 느낀 깨달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앞서 소개한 규칙과 진행 방식에 익숙하다는 전제하에, 게임 도중에 외치는 두 가지 추임새(“각자 최선을 다하세요!”와 “천천히 움직이세요. 다칩니다!”)가 어떤 의미를 갖고, 그 속에서 왜 ‘전체’가 흔들리는지, 그리고 상위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함께 짚어볼게요.
이전 글: 이등변 삼각형 게임과 시스템사고 (1) - 지렛대 효과
1. ‘각자 최선을 다해 주세요!’ - 부분 최적의 역설
이등변 삼각형 게임에서, 저는 종종 참가자들에게 **“각자 최선을 다해주세요!”**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모두가 자기 기준(두 명과의 이등변)을 지키려고 열심을 내면 낼수록, 그룹 전체는 더욱 요동치는 모습을 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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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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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성 때문입니다. 나만의 부분 목표(“두 사람 사이에서 삼각형을 만들기”)에 최선을 다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도 각자 기준에 따라 움직이면 서로 얽히며 의도치 않은 ‘출렁임’이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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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도 부서별 성과(부분 최적)을 극대화하려다 보면, 오히려 회사 전체(전체 최적)에 갈등과 비효율이 생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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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분 최적 노력이 상위 시스템 관심을 줄인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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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떤 과제나 역할에만 몰두하면, 정작 그 과제가 속한 더 큰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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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부분 최적에 매진할수록 상위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라는 구조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2. 이등변 삼각형 게임이 던진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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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요약: 여러 사람이 각자 두 명을 선정해, 그 두 사람과 같은 거리가 되도록 움직이는 실험입니다. 게임을 시작하면 우왕좌왕 다 같이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균형점’으로 멈추거나, 특정 인물이 움직임을 멈추면 전체가 변동을 겪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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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자기 기준(내가 선택한 두 사람)만 충실히 따르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든 사람이 서로 얽혀 있어 시스템 전체(집단)의 움직임이 예측과 달리 꼬이기도 하고, 뜻밖의 형태로 멈추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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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내가 열심히 하는 게 전체 최적일까?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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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부분 최적이 전체 최적이 되진 못한다”는 교훈이 나옵니다. 각자 맡은 역할에만 몰두한다 해도, 그것이 시스템 전체에는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는 겁니다.
3. “부분 최적화”의 신화 … 그리고 해적선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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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릴 때부터 “너 할 일만 잘해라, 나머지는 알아서 될 거다”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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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만약, 그 배가 ‘해적선’이라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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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선의 선원이 아무리 성실하게, 누구보다 치열하게 노젓고 돛을 펼치며 일한다고 해도, 결국 ‘해적질’이라는 최종 목적에 기여하는 꼴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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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극단적 비유이지만, 실제 사회에서도 과연 내가 열심히 탑승해 있는 이 구조(조직, 제도)가 과연 정당한가—한 번쯤 의심해 봐야 한다는 메시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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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유가 충격적일 수 있음을 압니다. “내가 근무하는 회사(혹은 기관)를 해적선에 비유한다고?” 하고 거부감이 들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 이야기는 ‘개인이 성실히 노력하는 것’ 자체를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더 큰 틀(배의 항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부족할 때 생길 위험을 강조하려는 거죠.
4. 〈퍼펙트 데이즈〉로 더해진 의문
2023년에 개봉했던 영화 〈퍼펙트 데이즈〉(감독 빔 벤더스)는 도쿄 시부야의 공중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가 매일매일 단순해 보이는 일상을 엄숙히 수행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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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관객이 그의 ‘작지만 경건한 태도’에 공감했습니다. 소박한 일상도 얼마나 소중한가, 하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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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는 영화를 보고 살짝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이 사람, 혹시 자기 삶의 방향성(더 큰 시스템)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이었어요.
물론 “공중화장실 관리”가 ‘해적질’이나 ‘악한 시스템’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영화 속 히라야마가 속해 있는 세계가 반드시 부조리한 구조라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극도의 ‘성실함’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해적선 선원처럼, 자신이 속한 시스템에 대한 의심이나 문제 제기 없이 묵묵히 일한다”는 이미지를 연상시킬 수도 있습니다.
5. 아이히만과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이제 제 ‘충격 요법’이 본격화됩니다. 제가 〈퍼펙트 데이즈〉를 보며 떠올린 건 아이히만(Adolf Eichmann)입니다. 홀로코스트 실행에 핵심 역할을 했던 인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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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선 그의 모습은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 같았고, 사실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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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체제의 일부로서 끔찍한 범죄에 기여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 모습을 두고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말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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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별다른 악의나 사악함 없이도, 그저 맡은 역할을 착실히 수행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악’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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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와 아이히만을 1:1로 동일시할 수는 없어요. 그건 지나친 비교이겠죠. 다만, “더 큰 시스템에 대한 의심 없이 내가 맡은 일만 열심히 하는 태도”가 전혀 다른 국면에선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충격 요법’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6. 자극적인 예시, 그러나 필요한 성찰
“해적선”이나 “아이히만” 같은 예시가 너무 극단적이라는 비판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저도 그런 비판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등변 삼각형 게임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부분 최적화가 결코 전체 최적화가 아닐 수 있다는 진실을 사람들이 좀 더 분명히 깨닫도록 하려면, 어느 정도 충격적인 사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과도한 비약으로 인해 “그럼 성실히 일하는 건 잘못이야?”라는 오해가 생길 수 있으니, 우리의 논점은 이것입니다:
“내가 몸담은 ‘큰 배’가 어디로 가는지, 혹은 그 배가 올바른지 아닌지에 대해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살피는 일 자체가 필요하다.”
7. 자본주의·교육 시스템에서 나타나는 평가 기제
현대 사회, 특히 효율성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선 보통 이렇게 작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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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맡은 부분에서 성과를 내면 → 개인적 보상(평가 점수, 승진, 인센티브)이 주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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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시스템 전체가 정말 잘 돌아가는지(중장기적 영향, 다른 부서나 이해관계자들과의 조화)는 상당 부분 고려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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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내가 맡은 역할 이상으로 골치를 썩일 필요가 없다”고 느끼게 됨.
이를 해결하고자 기업 경영에서는 BSC(Balanced Scorecard) 같은 통합 성과표를 만들어 “조직 전체 이익”과 “개인 목표”를 연계하려 노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일부에만 해당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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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학교 교육 시스템을 보면, 철저히 ‘각자 최선을 다해 점수 올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학생들은 등수나 성적 평가에 몰두할수록, 정작 ‘전체 맥락’이나 ‘공동체적 사고’를 기를 기회가 적어집니다.
(1) “상위 시스템을 보라”는 훈련이 부족하다
그래서 학교에서 자란 많은 사람들이, 사회에서도 기본적으로 자기 자리만 잘하면 된다고 믿게 됩니다. 물론 성실함은 훌륭한 태도지만, 더 큰 시스템(조직, 사회, 지구적 환경)에 대한 시각이 결여되기 쉬운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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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시스템사고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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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역할이 어떻게 전체 구조와 맞물리고, 더 큰 그림에서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고민하고 반영하는 태도가 필수라는 것이죠.
8. “천천히 움직이세요. 다칩니다!” - 지연 효과와 예측 불가능성
이 게임에서 또 하나의 추임새:
“천천히 움직이세요! 다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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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안전도 이유지만, 사실 의도적으로 ‘지연 효과’를 만들기에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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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시스템에선 무수한 지연이 존재해, 정책 변경이나 행동 변화가 즉각 반영되지 않고 늦게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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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에서 천천히 움직이게 하면, 서로의 반응이 약간씩 늦게 전달되어 더욱 예측하기 어려운 움직임이 발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상황이기도 하죠.
9. “두 명만 내게 영향을 주었을까? 결국 전부였구나!”
게임 도중 참가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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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택한 두 사람이 나에게 영향을 주는 걸까, 내가 그들에게 영향을 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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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몇 명인가?”
라는 질문을 합니다. 대부분은 “두 사람”이라 대답합니다.
그러나 막상 게임이 시작되면, 사람들 모두가 끊임없이 우왕좌왕하게 되고, 곧 “사실상 모두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구나!”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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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참가자들은 “아, 계획대로 안 되는 이유가 단순히 내 역량 부족이 아니었구나!”를 깨닫고 안도하기도 하고, 동시에 “그렇다면 전체 관점을 함께 고민해야겠네”라며 각성하기도 합니다.
10. 현실 세계에서의 시사점: 시스템사고가 필요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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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대로 안 되는” 게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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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영향 요인을 통제할 수 없을뿐더러, 서로 얽히고 지연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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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개인의 무능함이라기보다는, 원래 시스템이 복잡해서 그렇다는 걸 인지하는 것이 첫 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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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 최적 노력 ↔ 상위 시스템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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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평가 기제(성과주의, 시험제도 등)가 “너만 잘해, 너만 높은 점수 받아라”라고 부추기기에, 정작 더 큰 틀(조직, 사회,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약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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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만 잘하면 되지, 왜 귀찮게 위를 신경 쓰지?” 하는 사고방식이 만연해지면, 전체적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최종 결과는 망가질 수밖에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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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사고 교육의 절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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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기업이나 국제기구(OECD, UNEP 등)에서도 ‘전체를 봐라, 연결성을 생각하라’는 시스템사고를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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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육 역시, 개인 평가(시험, 성적)만이 아니라 “우리 반 전체가 함께 잘해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같은 시스템적 과제를 부여해 보는 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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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결론: 성실함 vs. 시스템, 그 균형을 고민하자
다시 한번, 이등변 삼각형 게임에서 배우는 핵심은 연결성과 부분 최적의 함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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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런 노력만으로 절대로 전체 최적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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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내 일에만 몰두하면 된다”는 태도가 쌓이고 쌓이면, 시스템 전체가 삐걱대거나, 때론 예측 못 한 악영향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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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교육 시스템과 성과주의 문화가 이 부분 최적주의를 더 강화하고 있어, 상위 시스템(전체 구조)을 살피는 연습이 절실해진 시대입니다.
시스템사고는 “내가 속한 더 큰 맥락과 연결관계”를 의식하며, 내 행동이 어떻게 궁극적으로 나에게도 되돌아올 수 있는지 고찰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를 기르면, “부분 최적 + 상위 시스템 고려”라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데 조금씩 다가갈 수 있겠죠.
이등변 삼각형 게임으로 직접 몸으로 체감하는 경험은 짧지만 강렬합니다. 작은 움직임도 결국은 ‘전체’를 흔들고, 때론 그 전체의 파동이 다시 내게 돌아오니까요.하루하루 성실히 살지만, 동시에 ‘내가 속한 시스템의 방향’에 대해서도 꾸준히 관심을 갖는다면, (1) 개인의 열정과 (2) 전체 최적을 좀 더 조화롭게 맞출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바로 이것이 시스템사고가 이 시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입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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