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石洲) 이상룡의 유고집을 읽고 (2) - 구한말 어느 지식인의 사상 변화
석주 이상룡의 사상적 여정: 전통 유학자에서 근대적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석주유고 상권 해제(pp.2–11)를 읽으며 나는 석주 이상룡의 사상 궤적을 다시금 따라가게 된다.
그의 삶은 단순히 시대의 물결에 휩쓸린 흔적이 아니라, 유교적 가치관에 뿌리내린 전통 유학자에서 근대적 민족주의자, 그리고 한국적 사회주의를 모색한 독립운동 지도자로 거듭난, 참으로 극적인 변모의 과정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의 발자취마다 ‘왜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움직였을까?’라는 질문이 절로 따라붙는다.
나라면?
왜 그는 유학자에서 의병장이 되었을까?
이상룡은 퇴계 학통을 계승한 정통 유학자였다. 서산 김홍락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우며, 향음주례와 향약을 시행하면서 붕괴하는 유교적 질서를 지켜내려 했던 보수적 학자였다.
하지만 국난이 닥쳐오자 단순히 학문에만 머물 수는 없었다. 1894년 동학농민항쟁과 청일전쟁, 1895년 을미사변을 거치며 그는 무력으로라도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키웠고, 결국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직접 의병을 조직했다. 두 해를 준비한 끝에 1908년 거병했으나, 일본군의 기습으로 실패했다.
→ 전통 유학자에서 무력 저항의 길을 택한 순간, 그는 이미 단순한 학자가 아니었다.
의병 실패가 남긴 깨달음은 무엇이었나?
의병 실패 후, 그는 "암혈에 거처하면서 승패를 점쳤는데, 하나도 적중되지 못했으니, 이는 반드시 시국에 어두워서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자신을 책망했다. 이 구절은 그가 의병 활동에서 점술에 의존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시대 인식이 부족했음을 고백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전통적 유교 지식만으로는 현실을 읽어낼 수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후, 그는 수구 세력의 헛됨, 개화파의 매국, 무모한 무력 항쟁까지 모두 비판하면서, 오직 교육을 통한 국민 계몽에서 희망을 찾았다. 양계초의 저작을 발췌하고, 서양 근대 정치·사회 사상을 탐독하며, 그는 점차 왕조 국가관에서 국민주권 국가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조직하면서 “향촌 단위의 정당, 의회적 운영”을 구상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일본과의 타협적 태도를 보이던 본부를 비판하며 끝까지 국권 회복을 외친 그의 모습에서, 계몽운동가로서의 새로운 얼굴이 드러났다.
→ 의병의 좌절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사상적 도약’의 계기였다.
망명은 도피였을까, 전략이었을까?
1910년 국망 이후 그는 대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떠났다. 많은 이들에게 망명은 도피로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달랐다. 교포들의 토지 문제를 해결하고, 중국 국적을 취득하게 하고, 만주가 고대 한민족의 영토였음을 고증하며 정착의 정당성을 세워준 것. 이것은 단순한 피신이 아니라, 민족 독립의 기초를 닦는 총체적 기지 건설이었다.
경학사를 세워 교육과 실업을 통한 자강을 도모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해 독립군을 길러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그가 이미 국내 계몽운동의 사상을 현실의 무장 독립운동 체제로 전환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 망명은 도피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는 왜 사회주의에까지 눈을 돌렸을까?
1920년대, 그는 서로군정서 독판으로 무장 독립운동을 지휘했다. 동시에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추대되어 분열 진영을 통합하려 했다. 하지만 통합은 쉽지 않았다.
이 무렵 그는 사회주의의 평등사상에 주목한다. 소련의 노동자 중시 사상에 호감을 표했고, 『광의』에서는 사회주의를 “약소민족의 복음”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그는 맹목적이지 않았다. 자유연애나 가족 해체 같은 부분은 거부하고, 공자의 대동사상과 연결된 ‘가족 공동체적 사회주의’를 제시했다.
나는 이 지점에서, 그가 단순히 서양 사상을 빌린 것이 아니라, 한국적 토양에서 새롭게 번안·토착화하려 했음을 본다. 그것은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르는 지적 모색이었다.
→ 사회주의마저도, 그는 ‘한국적 대동 사회’로 재해석했다.
만년에 그가 남긴 ‘한가한 시름’은 무엇이었을까?
임정 국무령직을 내려놓고 만주 화전현으로 돌아온 그는, 「사고향」, 「방어」 같은 시에서 이루지 못한 대의에 대한 회한을 노래했다. 그러나 그것은 체념이 아니었다. 아들에게 “국토를 회복하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에 옮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으니, 마지막까지 꺼지지 않은 불꽃이었다.
나는 여기서, 스무 살에 읊었던 “한가한 시름(閒愁)”이 어떻게 평생을 관통하는 주제가 되었는지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젊은 날의 시름은 결국, 한평생 독립을 향한 고뇌와 실천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 한수(閒愁)는 회한이자, 끝내 사라지지 않은 의지였다.
✨ 회고
석주 이상룡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변심이 아니라 시대를 읽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바꿔낸 지성인의 자기 성찰과 실천의 궤적이 선명히 드러난다. 그는 유교적 가치에서 출발해 계몽, 민족주의, 사회주의까지 사유의 폭을 넓히며 한국 근대 지성사의 전형적인 궤적을 걸었다.
돌이켜보면, 그의 길은 나 자신에게도 묻는다.
“나는 지금, 시대의 격랑 속에서 무엇을 격물(格物)하고, 어떤 치지(致知)를 이루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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