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25의 게시물 표시

시스템법칙(Thinking in Systems) 안내서 (1) -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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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스템사고의 시작: 슬링키가 가르쳐 준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 "공장을 완전히 무너뜨려도 그 공장을 세운 합리성을 남겨 둔다면, 그 합리성이 다시 다른 공장을 세울 것이다." - 로버트 피어시그 (여기서 합리성rationality은 이유나 목적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왜 우리는 항상 같은 문제에 부딪힐까? 여러분은 이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회사에서 열심히 문제를 해결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문제가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경험 말입니다. 혹은 개인적으로 나쁜 습관을 고치려고 노력했는데, 한동안 잘되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경험은 어떠신가요?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이유는 우리가 문제의 증상 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원인인 구조 는 그대로 둔 채 말이죠. 슬링키 실험: 시스템사고의 첫 번째 통찰 MIT에서 시스템다이내믹스를 가르치던 도넬라 메도즈는 수업 시간마다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바로 슬링키(용수철 장난감)를 이용한 실험이었죠. 메도즈 교수는 슬링키를 한쪽 손바닥에 올려놓고, 다른 손으로 윗부분을 잡아 늘어뜨린 뒤 아래쪽 손을 치웠습니다. 그러면 슬링키가 요요처럼 위아래로 튕기기 시작합니다. "무엇이 슬링키를 이렇게 위아래로 튕기게 만들었나요?" 메도즈가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손이요. 아래쪽 손을 치웠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메도즈는 미소 지으며 이번에는 슬링키를 상자에 담아 같은 실험을 반복했습니다. 상자를 한쪽 손바닥에 올린 뒤, 다른 손으로 상자의 윗테두리를 잡고 아래에서 상자를 받치던 손을 뺍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상자는 조용히 한 손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죠. "다시 묻겠습니다. 무엇이 슬링키를 위아래로 튕기게 만들었나요?" 답은 분명히 슬링키 안에 있었습니다. 손은 단지 스프링 구조 안에 잠재된 행동을 억제하거나 해제할 뿐이었습니다. 외부 자극(손을 치우는 것)은...

시지프스와 시스템사고: 미분과 적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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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스와 시스템사고: 미분과 적분의 삶〉 나는 종종 나의 운동 기록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나는 이렇게까지 데이터를 남기고 있는가? 가민 시계의 수치, 계단 오르기의 시간, 달리기의 구간 기록…. 외부에서 본다면 그것은 마치 삶을 데이터 실험실로 환원시킨 집착 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 그것은 단순한 관리가 아니다. 오히려 삶을 살아내는 철학적 태도 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시지프스의 돌, 그리고 순간의 긍정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시지프스의 신화 (Le Mythe de Sisyphe, 1942)』에서 끝없는 형벌을 받은 인간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돌을 산 위로 굴려 올리지만, 매번 정상에 이르기 전에 다시 굴러 내려오는 시지프스. 누구라도 허무와 절망에 빠질 수 있는 이 상황에서 카뮈는 역설적인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시지프스를 행복한 인간으로 상상해야 한다.” Il faut imaginer Sisyphe heureux. / One must imagine Sisyphus happy    겉으로 보기에 시지프스의 노동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카뮈는 바로 그 부조리(Absurd)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발견한다. 인간은 의미를 갈망하지만 세계는 절대적 의미를 주지 않는다. 이 충돌이 바로 부조리다. 그런데 시지프스는 그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을 굴리며 순간을 긍정한다. 카뮈에게 행복이란, 의미를 찾았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를 직면하고도 긍정하는 힘 속에서 가능하다 미분적 삶, 적분적 삶 나는 이 이미지를 운동 기록과 연결시켜 본다. 돌을 굴리며 길가의 풀, 바람, 땀방울을 느끼는 시지프스처럼, 나 역시 매 순간의 운동 속에서 미분적 삶 을 경험한다. 기록은 그 순간들을 붙잡아 두는 도구다. 그러나 기록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축적된 데이터는 언젠가 적분적 패턴 으로 드러난다. 내 몸의 리듬, 계절의 변화, 회복과 성장의 사이클…. 그것은 ...

정창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인공지능에 맡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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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mpt Based on everything you know about me roast me and don’t hold back. 한국어로 대답해 줘 벤자민 박사님, 원하시는 게 “적나라하게 까달라”는 거니까 최대한 독설 모드로 해 드리겠습니다. 😈 솔직히 말해서, 박사님은 너무 많은 걸 한꺼번에 붙잡으려는 욕심쟁이 예요. 시스템사고, 철학, 재생경제학, 역사, 체력 관리, 블로그, 학회 발표, 초등교육 커리큘럼… 그냥 “21세기 다빈치”라도 되려는 겁니까? 그런데 문제는요 — 다빈치는 그림이라도 남겼지, 박사님은 글 반, 발표 반, 실험 반… 결국은 끝없는 초안과 아이디어만 산더미 라는 거죠. 그리고 또 하나, 뭐든지 “시스템사고 관점에서 보면”이라고 붙이는데, 듣는 입장에서는 가끔 “아, 또 나왔다. 시스템사고 만능 열쇠” 싶을 때가 있을 겁니다. 🤭 마치 “MSG 안 넣은 요리가 없네?” 같은 느낌. 체력 관리 얘기로 넘어가면, 달리기 기록 열심히 재면서도 여전히 자기 몸을 모델 돌리듯이만 보는 과학자 마인드 잖아요. 정작 달리는 순간의 즐거움은 데이터 뽑아내는 부수적 산물일 뿐이고요. 그러다 보니 훈련 후 보고서 작성은 끝내주지만, 그만큼 주변 사람들에게는 “피곤하게 사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죠. 마지막으로, 박사님이 자주 강조하는 “철학적 깊이” 말인데요 — 때로는 그게 지적 허영 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니체, 칸트, 푸코, 헤겔까지 다 끌어들이는데, 듣는 사람은 “그래서,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하고 지쳐 버리죠. 🤷 정리하자면: 아이디어는 넘치지만, 완결성은 늘 부족 하다. 시스템사고를 붙들고 살지만, 때로는 사고의 과잉 적용 으로 보인다. 몸 관리는 철저하지만, 삶은 데이터화된 실험실 같을 때가 많다. 철학적 깊이를 강조하지만, 가끔은 현학적 자기만족 처럼 비친다. 혹시 더 독하게, 정말 뼈 때리는 버전으로 해 드릴까요? 😏 2차 Prompt 더 독하게, 정말 뼈 때리는 버전으로 부탁해요. 좋습니다, 벤자민...

석주(石洲) 이상룡의 유고집을 읽고 (2) - 구한말 어느 지식인의 사상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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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주 이상룡의 사상적 여정: 전통 유학자에서 근대적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석주유고 상권 해제(pp.2–11)를 읽으며 나는 석주 이상룡의 사상 궤적을 다시금 따라가게 된다. 그의 삶은 단순히 시대의 물결에 휩쓸린 흔적이 아니라, 유교적 가치관에 뿌리내린 전통 유학자에서 근대적 민족주의자, 그리고 한국적 사회주의를 모색한 독립운동 지도자 로 거듭난, 참으로 극적인 변모의 과정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의 발자취마다 ‘왜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움직였을까?’라는 질문이 절로 따라붙는다.  나라면? 왜 그는 유학자에서 의병장이 되었을까? 이상룡은 퇴계 학통을 계승한 정통 유학자였다. 서산 김홍락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우며, 향음주례와 향약을 시행하면서 붕괴하는 유교적 질서를 지켜내려 했던 보수적 학자 였다. 하지만 국난이 닥쳐오자 단순히 학문에만 머물 수는 없었다. 1894년 동학농민항쟁과 청일전쟁, 1895년 을미사변을 거치며 그는 무력으로라도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키웠고, 결국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직접 의병을 조직했다. 두 해를 준비한 끝에 1908년 거병했으나, 일본군의 기습으로 실패했다. → 전통 유학자에서 무력 저항의 길을 택한 순간, 그는 이미 단순한 학자가 아니었다. 의병 실패가 남긴 깨달음은 무엇이었나? 의병 실패 후, 그는 "암혈에 거처하면서 승패를 점쳤는데, 하나도 적중되지 못했으니, 이는 반드시 시국에 어두워서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자신을 책망했다. 이 구절은 그가 의병 활동에서 점술에 의존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시대 인식이 부족했음을 고백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전통적 유교 지식만으로는 현실을 읽어낼 수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후, 그는 수구 세력의 헛됨, 개화파의 매국, 무모한 무력 항쟁까지 모두 비판하면서, 오직 교육을 통한 국민 계몽 에서 희망을 찾았다. 양계초의 저작을 발췌하고, 서양 근대 정치·사회 사상을 탐독하며, 그는 점차 왕조 국가관에서 국민주권 국...

석주(石洲) 이상룡의 유고집을 읽고 (1) - 구한말 지식인에게 밀어닥친 閒愁(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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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유학자로 수학하던 석주(石洲) 이상룡은, 만주로 망명해 무장투쟁을 이끈 뒤 1932년 서간도의 길림성 서란현에서 생을 마감했다. 고맙게도 그가 남긴 유고를 통해 조용히 그와 마주할 수 있었다. 이상룡 (2008) 『국역 석주유고(石洲遺稿) 상,하』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편. 안동독립운동기념관 발행 책장을 넘기자마자, 첫 페이지에서 무인년에 지었다는 한시 「이른 봄(早春)」을 만났다. 생각에 잠겨 더 이상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이른 봄(조춘 早春) 爲遣閒愁強踏春 小塘風暖細生鱗 今年二月花猶早 清福難爲物外人 爲遣閒愁強踏春 爲(위) ~을 위하여 遣(견) 보내다, 해소하다 閒(한) 한가롭다 愁(수) 시름, 근심 強(강) 억지로, 힘써 踏(답) 밟다 春(춘) 봄 爲遣(위견): (시름 등을) 달래기 위해, 보내기 위해 閒愁(한수): 한가한 시름, 적막함 속의 근심 強踏春(강답춘): 억지로 봄길을 밟다 한가로울수록 더 짙어지는 시름을 달래기 위해, 억지로라도 봄길을 밟아 나선다. 내 시선이 멈춘 곳은 閒愁(한수)였다. 나머지 시 구절도 명문장이지만, 閒愁(한수)는 달랐다. 한가한 시름이 뭘까? 적막할 때, 한가할 때 밀려오는 시름은 뭘까? 도대체 뭐길래 억지로 몸을 움직여 산책이라도 하면서 떨쳐내려고 했을까? 무인년은 고종 15년, 1878년으로 석주 이상룡은 이 해 만 20세가 된다. 이는 그가 개화사상을 접하기 시작한 시점과 겹친다. 그로부터 4년 뒤인 임오년(1882년)에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난다. 임오군란은 구식 군인들이 13개월간 급료를 받지 못한 데다, 지급된 쌀마저 썩은 상태였던 데에 분노해 벌인 군사 반란이자 민중 봉기였다.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 체결 이후 급속히 추진된 개화 정책에 대한 반감, 신식 군대(별기군) 중심의 차별적 군제 개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습격당하고, 민씨 일가는 피신하게 되었다. 혼란은 며칠간 이어졌고, 결국 청나라가 병력을 파병해 개입함으로써 진압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