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石洲) 이상룡의 유고집을 읽고 (1) - 구한말 지식인에게 밀어닥친 閒愁(한수)

 



조선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유학자로 수학하던 석주(石洲) 이상룡은, 만주로 망명해 무장투쟁을 이끈 뒤 1932년 서간도의 길림성 서란현에서 생을 마감했다. 고맙게도 그가 남긴 유고를 통해 조용히 그와 마주할 수 있었다.

이상룡 (2008) 『국역 석주유고(石洲遺稿) 상,하』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편. 안동독립운동기념관 발행

책장을 넘기자마자, 첫 페이지에서 무인년에 지었다는 한시 「이른 봄(早春)」을 만났다. 생각에 잠겨 더 이상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이른 봄(조춘 早春)

爲遣閒愁強踏春
小塘風暖細生鱗
今年二月花猶早
清福難爲物外人

爲遣閒愁強踏春
爲(위) ~을 위하여
遣(견) 보내다, 해소하다
閒(한) 한가롭다
愁(수) 시름, 근심
強(강) 억지로, 힘써
踏(답) 밟다
春(춘) 봄

爲遣(위견): (시름 등을) 달래기 위해, 보내기 위해
閒愁(한수): 한가한 시름, 적막함 속의 근심
強踏春(강답춘): 억지로 봄길을 밟다

한가로울수록 더 짙어지는 시름을 달래기 위해, 억지로라도 봄길을 밟아 나선다.

내 시선이 멈춘 곳은 閒愁(한수)였다. 나머지 시 구절도 명문장이지만, 閒愁(한수)는 달랐다. 한가한 시름이 뭘까? 적막할 때, 한가할 때 밀려오는 시름은 뭘까? 도대체 뭐길래 억지로 몸을 움직여 산책이라도 하면서 떨쳐내려고 했을까?

무인년은 고종 15년, 1878년으로 석주 이상룡은 이 해 만 20세가 된다. 이는 그가 개화사상을 접하기 시작한 시점과 겹친다. 그로부터 4년 뒤인 임오년(1882년)에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난다.

임오군란은 구식 군인들이 13개월간 급료를 받지 못한 데다, 지급된 쌀마저 썩은 상태였던 데에 분노해 벌인 군사 반란이자 민중 봉기였다.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 체결 이후 급속히 추진된 개화 정책에 대한 반감, 신식 군대(별기군) 중심의 차별적 군제 개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습격당하고, 민씨 일가는 피신하게 되었다.

혼란은 며칠간 이어졌고, 결국 청나라가 병력을 파병해 개입함으로써 진압되었다. 이에 따라 청의 내정 간섭이 심화했고, 일본은 일본대로 군사·외교적 보복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만큼 어수선하고 중대한 전환기였다. 

석주(石洲)는 알고 있었을까? 

1877년에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전화회사, Bell Telephone Company를 설립했고, 1878년 미국 전역으로 전화선을 깐다. 1878년에는 미국 최초의 교환식 전화국이 설치된다. 에디슨은 1879년에 백열전구를 상용화 성공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1878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을 출간한다. 영국에서는 2차 산업화 시대 꽃을 피우면서 기계-철도-통신의 제국화에 들어가면서 도시 빈곤, 노동계급의 정치화가 일어난다. 

민씨 일가를 중심으로 하는 기생(寄生) 권력인 친청-친일에 기대는 권력과 민중의 삶의 괴리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고, 그에 따른 갈등도 고조되었을 것이다. 이 갈등을 해소하는 힘은 외부(청, 일)도 있었지만, 그는 민중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주목했을 것이다. 

1878년, 조선의 한 젊은 유학자가 ‘한가한 시름(閒愁)’을 노래하던 그해, 지구 반대편에서는 전화, 전등, 제국, 철강, 니체가 세상의 구조를 바꾸고 있었다. 그는 과연 무엇을 알았을까? 무엇을 감지하고 있었을까? 개화기 시기 지식인인 석주(石洲)는 어떤 정보를 얻고 어떤 고민을 했을까? 

시(詩) 나머지도 기록용으로 적어둔다. 


小塘風暖細生鱗
소당풍난세생린

塘(당) 연못
暖(난) 따뜻하다
細(세) 가늘다, 섬세하다
鱗(린) 비늘 (물고기의 비늘)

小塘(소당): 작은 연못
風暖(풍난): 바람이 따뜻하다
細生鱗(세생린): 가늘게 비늘이 자라다 → 물고기 비늘이 생기듯 봄기운이 미세하게 나타남

작은 연못에는 따뜻한 봄바람이 불고, 물고기의 비늘이 섬세하게 돋아나기 시작한다.

今年二月花猶早
금년이월화유조

猶(유) 오히려, 아직도, 여전히
早(조) 이르다

今年二月(금년이월): 올해 이월
花猶早(화유조): 꽃이 아직 이르다 / 꽃이 피기엔 여전히 이르다

올해 이월인데도 꽃은 아직 이르다. (혹은: 꽃이 여전히 피지 않았다.)

清福難爲物外人
청복난위물외인

清(청) 맑다, 고요하다, 청아하다
福(복) 복, 복락, 행복
難(난) 어렵다, ~하기 힘들다
爲(위) 되다, 행하다, 이루다

清福(청복): 맑고 고요한 복락→ 속세의 욕망이나 번잡함을 떠난 심정적 평화와 기쁨
難爲(난위): ~하기 어렵다, 이루기 힘들다 
物外人(물외인): 사물의 바깥에 있는 사람 → 세속을 초월한 사람, 즉 초탈한 인물

맑고 고요한 복락은, 세속을 벗어난 사람도 누리가 어렵다. → 세속을 벗어난 사람이 아니면 더 어렵다.


아래는 이상룡을 알게된 계기가 된 [범도]에 소개된 내용이다. 기록용으로 남겨 둔다. 

이상룡과 그의 아들 이준형

지청천이 이끄는 서로군정서를 홍범도에게 보내 조건 없이 연합하게 한 서로군정서 총재 이상룡은 1932년 음력 5월 12일 서간도의 길림성 서란현에서 세상을 떠났다. 5백 년을 누려온 조선 최고 명문가의 대궐 같은 집 ‘임청각'을 버리고 만주로 가 무장기지를 마련했던 이상룡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정객들이 오가며 권력을 논하는 상해의 임시정부로 나가기를 거부하고 서간도의 무장투쟁을 지도했다. 죽음을 앞둔 이상룡이 그와 더불어 싸워온 젊은 후배들에게 남긴 유언은 짧았다.

'작은 공로도 남기지 못하고 이렇게 쓰러지니,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될까 참으로 마음이 아프네.'

외아들이자 그의 동지였던 이준형에게는 '나라를 되찾기 전까지는 내 유골을 조국으로 가져가지 마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대로 이상룡을 서간도에 가매장한 이준형은 아버지의 유골 대신 아버지가 남긴 유고를 안고 귀국했다. 이상룡의 유고를 정리하는 아들 이준형의 가슴에 이 한 문장이 파고들었다.

- 의로움과 생명,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을 때는 의로움을 택하라.

공자와 맹자를 읽던 봉건 유림으로 고향을 떠나던 아버지 이상룡의 문장이었다. 하지만 이상룡은 자유를 주창하는 민주공화주의자의 문장으로 생을 마감했다.

- 자유의 반대는 노예이다. 자유를 보장받고 싶은가? 그러면 노예의 습관을 고쳐라.

이준형이 아버지의 피와 혼이 담긴 글을 정리하는 동안 일제는 끊임없이 변절과 배반을 강요했다. 반복되는 체포와 구금, 고문을 견디며 석주 이상룡의 문집 정리를 마친 다음 이준형은 스스로 목의 동맥을 끊었다. 그는 그렇게 일제의 강요를 영원히 거부했다. 그의 67세 생일날이었다. 그가 남긴 유언은 아버지보다 더 짧았다.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치욕을 더 보탤 뿐이다."

-방현석 (2023)『범도 2』문학동네 pp. 643-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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