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lectronic Oracle] ③ 가정(Assumption)은 '뇌피셜'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명한 제안
시스템다이내믹스(System Dynamics)나 컴퓨터 모델링을 가르치다 보면, 학생들은 물론 현업 연구자들조차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가정(Assumption)'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그 불편함의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Assumption:a thing that is accepted as true or as certain to happen, without proof ( Oxford Languages)
(증거없이 진리 또는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근거 없이 맞다고 여기는 것)
과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증거 없이(without proof)"라는 말은 모욕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그건 당신의 가정일 뿐이잖아요?"라고 공격하면, 과학자는 "아니요! 근거가 있습니다!"라며 방어하기 급급해집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글에서 '가정'이라는 단어의 명예를 회복하려 합니다. 모델링에서 가정을 세우는 행위는 단순히 부족한 데이터를 메우는 꼼수가 아닙니다. 그것은 은밀한 독재를 투명한 민주주의로 바꾸는 가장 강력한 정치적 행위와 연결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가정’은 두 층위입니다: 머릿속에 숨어 권위로 작동하는 가정(Type A)과, 밖으로 드러나 토론의 대상이 되는 모델 가정(Type B).
1. 두 가지 가정: '숨겨진 믿음' vs '드러난 전제'
우리가 '가정'을 이야기할 때, 사실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가정'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Type A. 믿음으로서의 가정 (Assumption as Belief): "나를 따르라"
이건 사전적 의미에 가깝습니다. “증거 없이 참이라고 믿는 것.” 이 의미에서 주목해야 할 특징은 ‘말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구조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어떤 지도자가 자신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말하더라도, 그 발언이 작동 메커니즘(인과 연결, 피드백, 절충)을 검토 가능한 형태로 제시하지 않는 한 그 가정은 구조적으로 암묵적입니다. 권위는 남지만, 논증은 남지 않습니다.
믿음으로서의 가정에는 다시 두 종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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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pe A-a. 조건(Condition)이 숨겨진 가정: 일부 조건에서만 통하는 말을 보편 진리처럼 과잉 일반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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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ype A-b. 전제(Premise)가 숨겨진 가정: 어떤 세계관/가치/인간관을 ‘그렇다 치고’ 깔아, 다른 질문을 봉쇄하는 프레임이 됩니다.
아래 사례들은 같은 문장을 두 렌즈(A-a/A-b)로 해부해 볼 수 있습니다.
사례 1. "사람은 돈을 더 주면 더 열심히 일한다."
기업이나 조직에서 가장 흔한 '보상에 대한 믿음'입니다.
Type A-a. 조건(Condition) 은폐: 과잉 일반화 - 진실: 이 말은 보상이 ‘공정성 회복’으로 인식되거나, 기본적 욕구가 충분히 충족되지 않은 맥락에서는 강하게 작동할 수 있습니다.
- 위험: 그런데 이 조건이 숨겨지면, 이미 연봉이 높은 창의적 인재나 번아웃 상태의 직원에게도 “돈만 더 주면 된다”는 선형적(Linear) 착각으로 흘러갑니다. (SD 관점: 포화(S자 곡) 관계를 직선처럼 취급하는 오류)
Type A-b. 전제(Premise) 은폐: 질문을 봉쇄하는 프레임
- 진실: 이 말은 인간의 동기를 단일 차원(금전)으로 환원하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깔고 있습니다.
- 위험: 전제가 숨겨지면, ‘사회적 인정, 자아실현, 동료애, 자율성’ 같은 동기 요인은 애초에 논의 테이블에 올라오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조직은 “보상만 만지작거리다” 더 중요한 구조(업무 설계, 권한, 학습, 관계)를 놓치게 됩니다.
사례 2. "기술이 발전하면 사회 문제는 해결된다."
현대 사회, 특히 AI 시대를 지배하는 강력한 믿음입니다.
Type A-a. 조건(Condition) 은폐:과잉 일반화
- 진실: 이 말은 문제가 ‘기술적 효율성 부족’에서 기인했을 때에는 실제로 큰 해결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 위험: 그러나 조건이 숨겨지면, 분배의 문제나 윤리적 갈등 같은 사안에도 기술을 들이대게 됩니다. 기술은 종종 가능한 선택지를 바꾸지만, 분배와 정당성의 갈등을 자동으로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Type A-b. 전제(Premise)로서의 은폐: 질문을 봉쇄하는 프레임
진실: 이 말은 '기술 만능주의(Techno-solutionism)'라는 특정 세계관을 자동으로 선택되는 해법인 양 바닥에 깔고 있습니다.
위험: 사회 문제를 '정치와 합의'가 아닌 '공학적 최적화'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만듭니다.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가치를 '제거해야 할 비효율'로 취급하는 위험한 전제입니다.
사례 3. "강한 리더가 조직을 살린다."
위기 상황에서 흔히 나오는 영웅주의적 믿음입니다.
Type A-a. 조건(Condition)으로서의 은폐: 과잉 일반화 ("어떤 상황인가?"를 숨김)
- 진실: 이 말은 '단기적 비상사태'이거나 '일사불란한 실행이 필요할 때'라는 조건 하에서 잘 작동할 수 있습니다.
- 위험: 창의성과 자율성이 필요한 혁신 단계에서도 강한 통제를 가해, 오히려 조직의 집단 지성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Type A-b. 전제(Premise)로서의 은폐:
질문을 봉쇄하는 프레임('누구 탓인가?'를 숨김)- 진실: 이 말은 조직의 성패가 시스템의 구조가 아니라 '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다는 전제(Methodological Individualism)를 깔고 있습니다.
- 위험: 조직이 망가진 진짜 원인(잘못된 프로세스, 보상 체계, 피드백 루프)은 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사람만 바꾸면 된다"는 헛된 희망 고문에 시달리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 머릿속(Mental Model)에 있는 것입니다. 리더나 정책 결정자가 증거는 없지만 경험적으로 "세상은 이렇다"고 믿는 신념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암묵적 신념(Implicit Belief)입니다.
- 특징: 구조적으로 암묵적(Structurally Implicit)입니다.
- 문제: 숨겨져 있기 때문에 검토할 수도, 비판할 수도 없습니다. "내 감이 그렇다는데 왜 토를 달아?"라는 권위만 남습니다. 이것은 독재적입니다.
Type B. 모델의 가정 (Model Assumption): "함께 검토하자"
이것은 모델을 만들기 위해 선택한 전제(Model Premise/Specification)입니다.
- 특징: 명시적(Explicit)입니다. 수식, 도표, 숫자로 만천하에 공개됩니다. 그 결과 각종 수치와 시각적인 상징 기호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시스템의 작동 메커니즘이 어떻게 되는지, 숫자들은 얼마나 정밀한지(precision), 정확한지(accuracy)를 따져볼 수 있습니다.
- 목적: 이것이 절대적 진리라서가 아니라, "이 조건에서 시스템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자"는 논리적 제안입니다. 이것은 민주적입니다.
- 주의: 모델 파일을 공개하는 것만으로 모든 가정이 자동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특히 무차원 승수(lookup/그래프 함수)의 모양, 도메인·레인지, 임계값 같은 기술적 가정은 ‘그림을 본다’만으로는 놓치기 쉽습니다.
- 조건: 따라서 민주적 투명성은 단순한 공개(availability)가 아니라, 이해 가능성(interpretability: 설명·주석·가정 목록)과 재현 가능성(reproducibility: 동일 조건 재실행 및 대안 가정으로 비교 실행)까지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 가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검토 가능한 형태로 접근되고 다시 돌려볼 수 있어야 공론장의 토론 대상이 됩니다.
2. 숨겨진 것은 비판할 수 없다
문제는 첫 번째 가정, 즉 '암묵적 신념'이 정책 결정에 그대로 쓰일 때 발생합니다. 리더나 정책가의 머릿속에 있는 신념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숨겨져 있기 때문에 검할 수도, 비판할 수도 없습니다. "내 감이 그렇다는데 토 달지 말라"는 권위만 남게 되죠. 이것은 독재적입니다.
반면, 두 번째 가정인 '모델 가정'는 다릅니다. 모델러가 "임금과 생산성의 관계를 S자 곡선으로 가정했다"고 명시하는 순간, 이것은 토론의 대상이 됩니다. 얼마든지 근거를 대면서 "그 곡선의 기울기가 너무 가파르다, 또는 완만하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적입니다.
3. 시스템 다이내믹스의 진짜 역할
따라서 시스템 다이내믹스의 역할은, 우리 머릿속의 불완전한 암묵적 신념을 '정답'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SD의 진짜 역할은 암묵적 신념을 검토 가능한 형태(모 가정)로 '외현화(Externalization)'하여, 사회적 토론과 수정이 가능하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모델에 가정을 입력하는 행위는 "이것이 진리다"라고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생각을 이렇게 구조화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함께 검토해 보자"라고 투명하게 제안하는 것입니다.
4. 위험한 것은 '가정'이 아니라 '은폐'입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가정을 쓰는 것이 위험한가?"
아니요. 위험한 것은 assumption(가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숨겨져 있어 비판할 수 없을 때입니다.
감춰진 생각은 독단이 되지만, 드러난 모델은 공공재가 됩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그러나 책임감 있게 가정을 세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모델은 지금 투명하게 말을 걸고 있습니까?

<>이 무려 1985년에 출간된 서적임에도, 현재에도 많은 의미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생각이 많아집니다.
답글삭제특히, 신념이 숨겨져 있는 가정과, 모델 가정에 대한 설명에서 깊은 공감을 하였습니다. 특정 구조의 "이면"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는 개인이든 사회든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여기서, 어떤 신념이 "암묵적으로 반영된 가정"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구조에서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확인할 길이 없고 비판 또한 불가능하므로 구조를 변화시킬 수 없도록 한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한편, 모델 가정으로 초기에 설정된 값을 민주적인 합의에 의해서 변경이 가능하다는 점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 우선순위라고 생각됩니다. 특정 집단의 결정은 리더의 단독 결정이 아닌, 집단 구성원과의 소통에 의해 합의된 내용으로 결정이 이루어졌을 때 누구에게나 더욱 좋은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시스템 다이내믹스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부분을 또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숫자는 "민주적으로 설정"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얻었다는 점에서 많은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