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대로 합시다" - 뭐가 문제일까요?

 💡 왜 우리는 점점 ‘법대로’ 해결하려 할까요?

— 사법화(juridification)와 주리스토크라시(juristocracy)를 이해하기 위한 짧은 안내서

최근 우리 일상 속에서는 작은 갈등부터 정치적 분쟁까지 “법대로 하자”는 표현이 매우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예전에는 대화나 주변의 중재로 적당히 해결되던 일들까지도 이제는 신고·고소·규정·법적 절차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 현상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1. 🌍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변화

독일, 네덜란드, 미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도 일상의 갈등이 곧바로 법적 절차로 넘어가는 일이 늘어났습니다. 

  • 학교에서는 작은 다툼도 신고 절차로 이어지고
  • 직장에서는 대화보다 규정 해석이 우선되며
  • 지역 사회에서는 중재자 역할이 사라지고
  • 정치에서 해결해야 할 사안이 법원·헌재로 넘어가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 흐름을 설명하는 개념이 바로 사법화(juridification)주리스토크라시(juristocracy)입니다.

2. 🧭 두 개념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 사법화(juridification)는 
    사회적·정치적·일상적 갈등이 법적 절차로 이동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 주리스토크라시(juristocracy)는 
    정치의 핵심 결정을 사법부가 사실상 주도하는 체제를 가리킵니다.

즉, 사법화는 과정, 주리스토크라시는 그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개념에 대한 대표 문헌은 다음과 같습니다. 

📘 1) 사법화(juridification)
  • 소개한 문헌:
    Jürgen Habermas, Between Facts and Norms (1992)
    Günther Teubner, “Juridification of Social Spheres” (1987)

  • 핵심 의미:
    사회·경제·정치·일상에서 발생하는 갈등이
    대화·관례·중재 → 법·규정·소송으로 이동하는 과정입니다.

📗 2) 주리스토크라시(juristocracy)

  • 대표 문헌:
    Ran Hirschl, Towards Juristocracy (2004)
    Ran Hirschl, “The Judicialization of Politics” (2006)

  • 핵심 의미:
    원래 정치적 의사결정이 이루어져야 할 문제까지도
    사법부가 사실상 결정하는 체제를 가리킵니다.

이 두 개념은 현대사회의 구조 변화, 즉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이 바뀌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등장한 학술적 논의입니다. 그만큼 철학적으로도 논의된 주제입니다. 

3. 🔗 한편, 철학적 인과 구조로 단순화해 보면

이 변화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최근 몇 년 사이 사회적 구조 변화가 겹치며 빠르게 가속화된 결과입니다. 

  • 온라인 중심의 소통은 익명성과 단절감을 키워 서로를 신뢰하거나 규범을 공유하는 기반을 약화시켰습니다. - 디지털 환경이 만든 개별화 부작용
  • 코로나19 기간 동안 공동체 공간이 멈추면서 사회적 규범을 유지·갱신할 기회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 코로나19가 만든 장기적 격리 경험 부작용
  • 사법부의 개입 범위가 넓어질수록 시민들은 일상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점점 잃기 때문에, 사회적 규범의 수준은 다시 낮아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 사법부 의존도의 부작용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인과 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 디지털 개별화 정도 → 사회적 규범 수준 (–)
  • 사회적 규범 수준 → 비공식 갈등 해결 능력 (+)
  • 비공식 갈등 해결 능력 → 사법 의존도 (–)
  • 사법 의존도 → 사법부 권위 인식 (+)
  • 사법부 권위 인식 → 정치적 책임 회피 성향 (+)
  • 정치적 책임 회피 성향 → 사법 개입 범위 (+)
  • 사법 개입 범위 → 사회적 규범 수준 (-)

결국 사회 전체가 “법의 방식”**과 “사법적 판단”에 구조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흐름이 만들어졌습니다.

4. 🧱 그렇다면 사회적 규범을 복원하면 해결될까요?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전 공동체 규범을 되살리면 갈등이 줄지 않을까?”

그러나 이 해법은 오늘날의 조건과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한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 첫째, 전통 규범은 종종 위계 구조와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옛 규범에는 성별, 나이, 가문, 지역 등의 위계가 자연스럽게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양한 위계 구조에서 단일한 위계를 만드는 시도는 바로 권위주의로 연결됩니다. 특정 분야의 권위가 다른 위계 질서에도 권위를 가지게 하는 경향을 뚜렷하게 가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회 경제적으로 능력있다는 것에 권위를 부여하려는 배능주의(meritocracy)와 권위주의가 연결됩니다. 미국의.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의 주장에서 쉽게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위계 구조를 되살리려는 움직임으로, 현대 사회의 다양성과 민주적 조건과는 맞지 않습니다.  

❌ 둘째, 현대사회는 과거 규범이 작동하던 환경을 잃었습니다

핵가족화, 디지털 네트워크, 높은 이동성, 코로나19로 인한 장기적 단절 경험 등 현대의 사회 구조는 이미 과거와 크게 달라졌습니다. 따라서 옛 방식의 규범을 그대로 되살리자는 접근은 현실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5. 🌱 그렇다면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요?

사법 의존이 계속 확대되는 현상은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과거로 되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화를 통해 조정하고,
공적 문제를 함께 논의하는 
새로운 방식의 숙의(熟議) 민주주의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단순한 제도적 논의가 아니라 현대 사회의 조건 속에서 새로운 사회적 규범을 구성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만병통치약 같은 뚜렷한 정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문제가 “사법화”와 “사법 중심 정치”로 수렴하고 있다면, 그 반대 방향에는 반드시 ‘함께 말하고, 판단하고, 조정하는 능력의 회복’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남대 철학과 박구용 교수를 중심으로 논의를 활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같이 고민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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