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미분을 위한 명상
시스템다이내믹스 모델링 작업 1단계는 주의를 끌지 못한 채 흘러가기 일쑤입니다. 모델 세팅을 하는 단계인데도 말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 시간 단위를 무엇으로 할지 결정합니다. munite? hour? day? year?
- 모델 시간의 길이를 정합니다. 12시간 단위? 100시간 단위? 등
- DT(Delta Time)를 정합니다. 이때 무의식적으로, 기본적으로 입력된 1/4(0.25) 또는 1/16(0.0625) 값을 그대로 둔 채 넘어갑니다. 사실 그래도 됩니다. 나중에 얼마든지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기타 등등 소소하게 선택할 내용이 있지만, 그대로 둔 채 넘어갑니다. 저도 무심하게 흘릴 정도로 기타 선택 사항들은 일반적인 모델링 작업에서 민감한 내용이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는 DT를 재조명하려고 합니다.
시간 단위를 year로 하고 시간 길이를 10년으로 정하면 모델은 10년 동안의 변화를 시뮬레이션하게 됩니다. 그러면 컴퓨터가 몇 번 계산하게 할까요?
- 1년에 한 번씩 10번 계산하게 할까요?
- 1년에 두 번씩(반기별로) 20번 계산하게 할까요?
- 1년에 네 번씩(분기별로) 40번 계산하게 할까요?
모두 정하기 나름입니다. 시간 단위(여기서는 1년)를 나눠서 계산하는 횟수를 늘릴수록 모델은 정교해지지만, 컴퓨터가 힘들어합니다. 물론, 최근 컴퓨터 사양이 좋아져서 맘껏 잘게 쪼개서 계산시킬 생각도 들지만, 아무리 정교해진다고 한들 눈에 띌 정도가 되지 않아서 적정 수준을 금방 찾게 됩니다.
DT를 통해 시간을 잘게 쪼개어 계산하는 것, 그것이 미분(differentiation)입니다. 보통 미분의 분모가 시간이기 때문에 미분은 찰나(刹那)의 순간을 표현하는 대명사가 됐습니다.
사실, '찰나의 순간'이라는 표현은 중복된 개념이기도 합니다만, 이 글에서는 혼용해서 쓰겠습니다. 굳이 구분한다면 불교 논서에서는 찰나 = 1/75초 또는 1/60초로 정의하기도 할 정도로 물리적 시간 성격이 있습니다. '찰나멸(刹那滅)'이라는 표현은 모든 존재는 찰나마다 생멸한다는 뜻으로 쓰이니까요. 반면, 마르틴 하이데커(Martin Heidegger, 1889 ~ 1976)는 'Augenblick (직역하면 눈 깜짝할 사이)'라는 표현에, 존재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이라는 의식적·현상학적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찰나”와 “순간”을 병행해 쓰면, 시간(Δt)과 의식(awareness)이 만나는 ‘삶의 미분점’이라는 거창한 의미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잊으십시오.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찰나의 순간이 모이면 시간이 되고 삶이 됩니다. 수학에서는 찰나의 순간을 모은 것을 적분(integration)이라고 합니다. 찰나가 삶이고 삶은 찰나를 품고 있습니다.
표현을 살짝 바꿔보겠습니다.
찰나 없이는 삶도 없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찰나를 예쁘게, 소중하게 관리하고 계신가요?
관리?
찰나의 시간을 관리해 본 적이 없는 분도 삶은 있습니다. 그래서 제 표현에 갸우뚱거릴 수 있겠습니다. 제 표현이 틀렸다고 생각하시나요? 모든 사람에게는 삶이 있습니다. 그 삶은 찰나의 순간이 모인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찰나의 순간을 관리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 당신의 찰나를 관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유튜브를 보면서 찰나를 보내셨나요?
- 다른 사람이 뭘 입고 있는지, 뭘 먹고 있는지 보면서 찰나를 보내셨나요?
- 남과 비교하면서 행복과 슬픔을 느끼며 찰나를 보내셨나요?
그런 찰나들이 내가 모르는 삶을 만들고 있습니다. 내가 의도한 찰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찰나의 순간들이 만드는 나의 삶이 어디를 향하는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심지어 매 순간순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시간을 보내면서 근무하고 있는 이 배가 해적선인지, 구명정인지, 전투함인지 알아야 합니다. 난 그저 최선을 다했다는 것만으로 해적선이 받는 처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서 성실히 근무한 나치 장교는 모든 찰나의 순간에 최선을 다했지만, 근무지 때문에, 그 업무의 방향(영향) 때문에 처벌받아야 했습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열변을 토한 '악의 평범성(惡의 平凡性, The Banality of Evil) '이 바로 이 개념입니다.
거창하고 무겁게 해적선, 나치 정권 부역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현재 내 몸, 내 생각, 내 삶은 모두 나의 찰나들이 만든 작품입니다. 이 정도까지 말씀드렸으니, 찰나에 관심이 생기셨는지요?
나의 찰나를 어떻게 관리를 해야 할까요? 현재까지 제가 찾은 최고의 답은 명상입니다.
시스템사고에 천착하는 저에게 명상은 내적 미분의 시간입니다. 이 명상은 가부좌를 틀면서 하는 정적인 명상뿐만 아니라 걸으면서 할 수 있는 도보 명상, 뛰면서 할 수 있는 러닝 명상, 여행하면서 하는 멍 때리는 명상 등 동적인 명상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명상이라는 행동은 인간만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닐까 싶어요. 다른 영장류나 생물체가 삶을 반추하는 명상을 한다는 관찰 연구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만약, 명상이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라면 명상을 잘한다는 것이 인간다운 존재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간단히 명상해 볼까요?
가만히 눈을 감고 나의 맥박을 느껴 보세요. 나의 숨이 허파에서 손끝, 발끝까지 전달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나요?
내 몸의 모든 감각이 찰나의 순간에 어떤 반응을 하는지 느껴 보세요. 저는 참 신기한 경험을 해 봤습니다. 저는 한때 아마추어 발레리노로서 발레 무대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때 연출을 해 주신 교수님과 발레리나들 덕분에 몸의 미세한 반응을 소메틱스(sometics, 몸학) 차원에서 아주 일부 경험을 해 봤습니다. 같이 해 보시겠어요? 누워있든, 가만히 앉아 있든 나의 모든 근육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만들어 보세요. 손톱만큼 작은 근육도 경직되지 않도록 순간을 관리해 보세요. 저는 너무 어려워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 몸이 나 때문에 혹사당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순간도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할 수 없다니!
이번에는 다른 명상입니다. 사실 제가 나누고 싶은 명상입니다.
눈을 감고 내가 하고 있는 일,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들을 떠 올려 보세요. 이 작업은 우선순위를 정하는 훈련이 아닙니다. 마치 햇살 좋은 날 햇빛에 그대로 노출된 집 먼지처럼 먼지 털기 하듯이 나에게 일어나는 일, 일어날 일들을 둥둥 띄워 보세요. 그리고 설계해 보세요. 내 삶의 모습을 그려보고 그 삶을 위해서 나는 어떤 찰나의 순간을 보낼지를 선택해 보세요. 그러면 그렇게 많아 보이던 먼지 중에서 몇 가지만 남고 나머지는 가라앉게 됩니다. 이 남은 것들이 진정 가치 있는 보석입니다. 이렇게 명상은 주위 모든 정보를 나를 중심으로 통합 분석하게 해 줍니다.
이렇게 찰나의 순간을 관리하는 명상 훈련을 하다 보면 깨닫게 되실 겁니다. 의외로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고 쫓아다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입버릇처럼 ‘굳이’라는 말을 하게 될 겁니다. 내 삶을 관리 또는 조정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스템사고 관점에서 명상을 다시 명명하자면 내적 피드백 감지 능력(Inner Feedback Sensitivity)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상을 통해 나를 둘러싼 무수히 많은 ‘일’들의 관계와 상호작용 또는 상쇄 작용(trade-off)을 생각하게 되고 내가 가진 제한된 자원(시간, 자금, 네트워크 강도 등)과 비교하면서 조정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DT를 설정하듯 나의 찰나를 설정(관리)하면 어떨까요? 정답은 없고 낯선 훈련이지만, 명상을 통해 아쉬움이 사라지는 행복한 순간을 경험하시리라 믿습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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